[김흥길의 경제이야기] 우리나라 근대 기업의 효시-경성직유
[김흥길의 경제이야기] 우리나라 근대 기업의 효시-경성직유
  • 경남일보
  • 승인 2019.12.08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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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길(경상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에 근대적 자본주의의가 도입된 시기에 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제각각이지만, 산업자본가와 임금근로자의 관계가 성립된 시기부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한 관점이라 보는 편이다. 우리나라에 임금근로자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은 개항이 이뤄지면서 서양의 광산업자들이 들어오면서 광산 근로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개항장에서는 외국 산품들이 들어오면서 하역작업 등에 동원된 부두근로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근대적 노사관계(엄격하게는 자본가와 근로자의 관계)가 성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민족자본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본가들은 대부분은 일본인이었다. 자료에 따르면, 1945년을 기준으로 보더라도 당시 한국에는 일본인 회사가 약 5,300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조선인 공업 회사의 자산은 전체의 5% 정도에 불과했고, 95%가 일본인 공업 회사 자산이었다.

조선 말엽에 일본으로부터 면사들이 밀려들어오자 국내에서는 이를 원료로 옷감을 짜는 직포공업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897년 김덕창염직공소의 설립을 필두로 직포공업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가내공업으로 생산양식이 공장제 생상양식 즉 매뉴팩처제도를 도입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경영능력이 없었기에 얼마 안가 모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한말에 설립된 직포공장 중에서 일제말기까지 명맥을 유지한 것은 김덕창엽직공소 하나뿐이었다. 김씨는 종로포목상 출신으로 직포공장을 경영하면서도 박승직, 최준환, 변상호, 김윤수 등 장안의 거상들과 협력하면서 기업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이들 기업들은 근대적 공장 형태인 매뉴팩처적인 생산양식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1896년 8월에 당시 33세의 박승직은 서울 베오개에 면직물을 취급하는 ‘박승직 상점’을 개설하였다. 이 상점은 해방직후인 1946년에 박두병에 의해 두산상회로 이름이 바뀌면서 오늘날 두산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두산은 한국 기네스협회로부터 국내 최고(最古) 기업 인증서를 받으면서 한국 기업사에 있어 효시(창립일:1896년 8월1일)임을 공식 인정받았다. 현존하는 한국 기업가운데 가장 오래된 기업이라고는 할 수 있으나 근대적 기업의 효시로 보기는 어렵다. 박승직 상점은 가게수준이었고, 박승직은 상인에 불과하여 공장제 공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매뉴팩처적 공장제 생산양식을 갖춘 근대적 공장은 1910년 수구문 일대에서 댕기, 염낭 끈, 분합, 허리띠, 주머니 끈, 대님 등을 만들던 이정각, 김성영, 박윤근, 안태직 등 18명의 직유(織紐)업자들이 모여 설립한 경성직유(京城織紐)를 우리나라의 근대기업의 효시로 본다. 경성직유는 설립과정에서 윤치호와 윤치소(윤보선전대통령의 선친) 등 당대 명사의 지원을 얻기도 했는데, 공칭 자본금 10만원에 공장 직공들이 90명으로 당시로서는 최대의 민족 계 기업이었다.

경성직유 말고도 일제 치하에서 세워진 민족 계 기업들은 섬유 업종이 주종을 이루었다. 경성직유의 설립과 거의 때를 같이 경성직물공사가 설립되었고, 그 이후에도 경성방직, 조선제사, 삼공상회, 조선견직, 대창직물, 충남제사 등이 차례로 설립되었다. 그 중에서 민족자본의 집결체라 할 수 있는 경성방직과 장안의 부호 민규식, 민덕기 등민씨 가문에서 세운 조선견직은 당시로서는 중량급 기업으로 꼽혔다. 이밖에 전기, 비누, 고무, 제약부문에서도 민족계기업의 활약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개성의 거상 김정호가 중심이 되어 설립된 개성전기는 일제하에서도 착실한 경영으로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다. 1910년대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공장 수가 경성직유를 비롯하여 100개 정도로 늘어나긴 했지만 자본이나 규모 면에서 매우 영세하였다. 대부분이 종업원 50명 미만의 공장들이었다. 그러다가 민족자본으로 설립되는 공장들이 수적으로 급속하게 늘어나면서 1920년대 후반에는 2,000개를 넘었고, 1930년대 말에는 4,000개를 넘기게 된다. 국내 전체 공장에서 한국인 공장의 비율을 보면 1910년대 초에는 25%도 안 되었다가 1930년대 말에는 60%를 넘어서게 된다.

/김흥길(경상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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