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에게 묻다 [10] 산청시대(2)
남명에게 묻다 [10] 산청시대(2)
  • 임명진
  • 승인 2019.12.10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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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현실인식, 서리망국론

‘경상도 진주에 사는 백성 조식은 진실로 두려운 마음으로 삼가 절하고 머리 조아리며 주상전하께 아룁니다.’

간곡한 어투로 시작되는 이 상소는 남명 조식이 68세가 되던 해인 1568년에 선조임금에게 올린 무진봉사의 한 내용이다. 명종에 이어 갓 즉위한 선조는 본래 왕위계승의 적통이 아니었다. 조선왕조에서 후궁 출신의 서자로 처음으로 왕에 오른 인물이다.

임금으로서 제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에 신분에 대한 열등감이 많았다. 선조는 즉위 초기에는 인재를 등용하고 국정쇄신에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학자로 명성을 날리던 남명과 퇴계 선생을 비롯한 원로급 선비들에게 국가경영의 자문을 구하기 위해 상소를 올리라고 명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남명이 올린 이 상소는 무진년에 겉봉이 봉해진 채로 올렸다고 해서 무진봉사로 일컫어진다.

통상 왕에게 바치는 상소는 승정원 등을 거쳐야 하지만 선조는 아무도 보지 못하게 자신이 직접 겉봉을 뜯어보겠으니 어떠한 내용도 올려도 된다는 취지였다.

무진봉사는 남명 조식 뿐만 아니라 퇴계도 올렸다. 퇴계가 올린 무진봉사는 6개 항에 걸쳐 나눴다고 해 ‘무진 6조소’라고 불린다.

퇴계와 남명의 무진봉사는 시국현안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국관, 해결방안 등에 있어 두 학자들 간의 차이를 비교해 볼 수 있다.

김경수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박사는 “선조는 역대 왕중에서 적자가 아닌 출신으로 왕이 된 인물로서 즉위와 동시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당시 국가원로급인 남명과 퇴계선생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상소의 내용을 보면 남명과 퇴계 선생의 시국관, 해결방안, 입장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고 말했다.

‘옛날부터 권세 있는 신하가 나라를 마음대로 하거나 외척이 나라를 마음대로 하는 일은 간혹 있었고, 여인이나 내시가 나라를 마음대로 하는 일도 간혹 있었습니다만, 지금처럼 서리가 나라를 마음대로 하는 일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정치가 대부에게서 나와도 오히려 안 되는데 하물며 아전에게서 나와서야 되겠습니까.(중략)

군민에 관한 여러 정치와 나라의 기무가 모두 안전들의 손에서 나옵니다. 세금으로 바치는 베나 곡식도 우수리를 더 얹지 않으면 통하지 않습니다.

대궐로는 재물이 모여들지 몰라도 팔도에서는 민심이 흩어질 대로 흩어져 열에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각 고을을 아전들 각자가 자기들끼리 할당해 마치 가지 사유물인 양 문서로 작성해 자손들에게 물려주기까지 합니다.

각 지방에서 바치던 특산물을 일절 바치지 못하게 해 지금까지 특산물을 바쳐왔던 사람들은 온 가족이 가산을 팔아 아전들에게 뇌물을 바치는 데 100배 정도로 많이 바치지 않으면 아전들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한 번은 그렇게 바칠 수 있지만 계속 그렇게 할 수 없어 도망가는 사람들이 속출합니다.(중략)

비록 옛날에 나라를 가로챈 왕망이나 동탁 같은 간신들도 이런 짓을 한 적이 없고 망한 나라도 이런 적은 없었습니다. 아전들이 이런 짓을 하고서도 만족하지 않으니 나아가 임금님의 내탕고마저도 훔칠 것입니다.

아전들이 도적이 되어 각 관청의 아전들끼리 서로 짜고서 나라의 심장부를 차지해 나라의 혈맥을 해치고 있으니 나라를 망친 뒤에야 그칠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라의 법을 맡은 관리들은 따져 묻거나 심문하지도 않습니다. 혹 어떤 관리가 규찰하려고 하면 아전들의 농간에 의해 견책을 받거나 파면되고 마니 뭇 관리들은 팔짱을 끼고서 녹만 받아먹고 아전들의 비위나 맞추며 지낼 뿐입니다.

아전들이 믿는 데가 없다면 어찌 이렇게 기탄없이 멋대로 날뛸 수 있겠습니까.’

남명이 올린 무진봉사의 핵심은 지방행정관을 보좌하는 서리(아전)들의 횡포가 극에 달해 나라가 망할 지경에까지 처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상소의 내용이 바로 서리망국론이다.

당시 조선은 지방관을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도록 했다. 개국 초기부터 자칫 지방관이 지역의 토호세력과 결탁해 반란과 역모 등으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한 한 까닭이다.

이런 까닭에 파견된 지방관은 해당 지역의 실정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고 자연스레 행정 보좌를 맡은 서리들이 사실상 실무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 서리들이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면서 가뜩이나 어려운 백성들의 삶이 더욱 피폐해졌다는 점이다.

남명은 상소를 통해 이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남명의 서리망국론은 당시 조선의 실상을 낱낱이 파헤친 것으로 후대 왕들의 어전회의에서도 자주 인용됐다.

‘아전들이 믿는 데가 없다면 어찌 이렇게 기탄없이 멋대로 날 뛸 수 있겠습니까. 이런 아전들과 한통속이 돼 뒤를 봐주고 있는 관리들은 과연 어떤 사람인지요? 전하께서 벌컥 노하셔서 기강을 떨쳐 재상을 불러 모아 그 원인을 따져 묻고 결단해서 나쁜 무리들을 완전히 제거하고 백성들의 뜻을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상소에서 남명은 선조에게 특단의 대책을 강구할 것을 당부했다. 서리들의 횡포를 감찰하려는 뜻있는 이가 나서도 뒷배들의 농간에 견책을 받거나 파면되는 일이 허다하기에 왕이 직접 나서 이 문제를 챙겨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 상소는 국정현안을 바라보는 남명의 선견지명을 엿볼 수 있는 상소이기도 하다. 선조는 자문을 구했지만 정작 남명이 받아본 답서에는 “유념하겠다”는 수준에 그쳤다.

나름 새로운 왕에게 기대를 걸었던 남명은 또다시 실망하고 만다. 이상필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장은 “당시 서리들은 따로 월급이 없었다. 국가기강이 문란해지면서 이들의 횡포를 제어할 만한 국가제도가 작동하지 못했다. 선생은 바로 이점을 지적했다. 고위벼슬아치들이 지방의 수령, 서리들과 연계돼 있는 부패 구조를 지적한 것”이라고 말했다.

남명의 예언은 적중했다. 그로부터 300여 년 뒤인 1862년 산청 단성에서 민란이 발생했다. 조선말 농민항쟁의 효시로 불리는 단성민란은 3일 만에 진주민란으로 확대되고 1년도 안 돼 전국 70여 개 군현으로 퍼져 전국적인 민란으로 확산됐다.

단성민란은 지방관과 서리들의 가혹한 수탈이 있었다. 단성은 가진 논과 밭에 비해 환곡의 양이 많아 당시 가구 수는 3000여 호에 지나지 않았지만 바쳐야 하는 환곡의 총수가 무려 10만 섬이 넘었다.

그 가운데 반이 아전들이 원곡을 축낸 포흠이었다. 포흠은 나라의 물건을 빌리고서는 납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단성민란의 발생은 남명이 지적한 서리의 횡포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명이 망국을 이야기한 서리의 횡포. 그것이 300년 뒤에 자신이 말년을 보내고 상소를 올린 단성에서 시작했으니 참으로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단성민란은 발발 32년 만에 동학농민과 갑오경장으로 이어진다. 갑오경장은 고종 때 실시한 개혁의 일환으로 비록 일본의 간섭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우리나라 근대화의 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신명사도

신명사도와 신명사명은 남명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남명은 학문 수양을 격렬하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자, 주렴계, 정명도, 주자 등 네 성현의 모습을 손수 그려서 만든 네 폭의 병풍을 세워놓고 마치 직접 가르침을 받는 듯이 공부했다.

신명사도는 그림처럼 마음의 작용을 마치 임금이 신하를 거느리고 정사를 보는 원리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신명사도에서 성곽의 안쪽은 사람의 마음이고 바깥쪽은 외부세계를 의미한다. 신체의 내외부로부터 일어나는 일들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경계를 성곽으로 나타낸 것은 외부로부터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사사로운 욕심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김경수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박사는 “신명사도는 남명이 주역의 개념을 바탕으로 이해하고 있는 인간 심성수양론의 원리를 그림으로 표현했으며 신명사명은 신명사도에 대한 해설을 뜻한다”고 말했다.

신명사도는 남명이 그림으로 도식화했지만 이를 보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산청 남명기념관에 신명사도 그림이 전시돼 있다. 현재 전해지는 신명사도는 감정 결과 조선중기의 재질이 확인돼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사성현 유상 병풍과 같이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다.


신명사도는 남명 조식이 주역의 개념을 바탕으로 , 이해하고 있는 인간 심성수양론의 원리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신명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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