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물 항아리
꽃물 항아리
  • 경남일보
  • 승인 2019.12.11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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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화(시인·진주문협 상임이사)
이미화 이사
이미화 이사

 

먼데서 첫눈 소식이 왔다. 지난 밤 몰래 내려 장독 위에 앉아 있으니 보고 싶으면 와도 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내가 사는 곳은 눈 보기가 귀하다고 한 말이 생각났나 보다. 문득 반질반질 닦아놓고 첫눈을 기다리던 고향집 장독간이 그리워진다.

엄마는 소설小雪이 지나면 장독을 깨끗이 닦으셨다. 윤기가 나는 장독 뚜껑 위에 심술궂은 바람에 휘날리던 낙엽이 잠시 걸쳐 앉았다 가면 몇 번이고 행주질을 하셨다. 그래놓고 첫눈을 기다리셨는데 그 모습이 꼭 귀한 이를 생각하는 것 마냥 애달파 보였다. 어쩐지 눈에 띄는 독이 하나 있었다. 부엌하고 가까운 음지에 따로 두고 한 번씩 열어보시면서 하늘에다 주문까지 걸곤 하던 그 독은 바로 우리 오남매의 약 항아리였다.

여름 끝 무렵부터 가을이 무르익을 때까지 오며가며 온 들녘의 갖가지 꽃들을 따서 독에 넣어놓고 첫눈이 오면 장독 위 깨끗한 눈만 받아 꽃물을 담그셨다. 그러고는 시간이 지나 꽃물은 다음 해 다시 첫눈 올 때까지 일 년 내내 우리 오남매의 만병통치약이 되었다. 배가 아파도 눈에 다래끼가 나도 막냇동생이 경기를 해도 한 대접씩 먹이셨다. 그러면 엄마 말처럼 한숨 자고나면 아픈 데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멀쩡해졌다.

꽃물의 효험을 아는 나이가 되면서 꽃 따는 일과 첫눈 받는 일은 자연스레 내 몫이 되었다. 깨끗한 꽃만 골라 큰 독을 다 채우려면 어린 내겐 지루하고 조급증이 나는 일이었다. 어느 해던가 친구랑 놀다가 허겁지겁 꽃을 따 젖은 채로 독에 넣는 바람에 다른 꽃들까지 썩어 꽃물을 못 쓰게 만들었다. 그때 마침 동생이 아파 보채는 걸 보고 꽃물을 버리게 만든 것이 미안해서 얼마나 마음 아파했는지 모른다.

다들 사는 게 녹록치 않아 병원이나 약국에는 엄두도 못 내던 시절이었다. 우리 오남매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 보면 그 민간요법이 영 엉터리는 아니었나보다. 지금도 엄마는 병치레 안 하고 잘 커준 건 순전히 꽃물 덕이었다고 공을 돌리신다.

저녁 산책길의 하늘에 두둥실 노란 항아리 하나 걸려있다. 친구랑 놀다 그르친 꽃물이 거기 가득 담겨있다. 온 밤하늘 어린 별들이 한 번도 아파 드러누웠다는 소릴 들은 적이 없는데 다 저기 저 달 항아리 속 꽃물 때문이었구나.

세상이 변해 지금은 병원도 약국도 지척이라 언젠가부터 사라진 엄마의 처방, 사는 일이 우울하고 답답해서 차곡차곡 쌓인 속병, 첫눈이 오면 들고 친정으로 가야겠다. 꽃물 대신 백 가지 꽃처럼 웅숭깊은 엄마의 온기로 갑갑한 속 풀어내련다.
 
/이미화(시인·진주문협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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