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489)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489)
  • 경남일보
  • 승인 2019.12.12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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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양왕용 교수가 쓴 이경순 시인의 생애-3
진주농림고등학교 시절 진주를 떠나지 않으려는 과정에서 그의 기행에 가까운 해프닝과 축산과 위생교사 시절 수업시간과 직원 조례와 종례시간의 파격적인 행보는 해방공간의 진주 교육계와 문단의 신화적 일화로 여러 사람들에 회자되고 있다.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교육자로서는 부적격자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해방공간의 진주문단 나아가서는 예술제의 중심 인물로 부상된다. 물론 그와는 대조적인 성격과 인격을 만년까지 지속한 파성 설창수 시인과 항상 함께 하는 길이었지만.

1946년 그는 파성, 청마 유치환, 백상현 등과 함께 <진주시인협회>를 발족시켜 회지 ‘등불’을 47년 2월 창간하여 48년 4월 5집부터는 <영남문학>으로 확대 개칭되면서 진주시인협회는 <영남문학회>로 확대되고 6집까지 낸다. 다시 <영남문학>은 <영문>으로 개칭되고 6,25전쟁이 나던 1950년을 제외하고 한 해도 결간되지 않고 1960년까지 18집을 내었다. 요즈음이야 전국 방방곡곡에서 많은 문예지가 쏟아지고 있지만 50년대 그것도 6.5전쟁기를 전후하여 지방에서 문예지를 비록 연간이지만 발간한다는 것은 동기 시인과 파성 시인이 진주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영문>의 대표가 파성이고 주간이 동기 시인이었다. 1948년 7월에는 전국문화단체 총연합회 진주지부 부위원장을 맡고 49년 4월에는 부산에서 창간한 <자유민보> 논설위원이 되기도 하였다. 동기 시인의 문단 데뷔 과정은 다음과 같다. 1947년 진주시협 기관지 <등불>에 <여인에게>를 발표하여 진주지역 시단에 데뷔하였고 1948년 경향신문에 <잔>을, 1949년 1월에 문예지 ‘백민’에 <유성>을 발표하여 서울시단에도 데뷔하였다. 이렇게 본격적인 활동을 해방 이후에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40대 장년이었기에 경향각지의 문단에서 항상 형님으로 대접을 받았다.

전국문화단체 총연합회 진주지부는 1949년 전국 최초의 종합예술제인 ‘영남예술제’를 개최하게 되는데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대회장은 파성 시인이었으나 문학부는 동기 시인이 책임자가 되어 이끌어 갔다. 1952년에는 파성 시인과 소설가 조진대와 함께 ‘삼인집’을 내는데 그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순욱 박사에 의해 자세히 연구된 바 있으며 필자 역시 ‘남강문학’ 창간호에서 자세히 언급한 바 있다. 그 안에서 동기 시인은 ‘생명부’라는 제목으로 시 15편을 수록하고 있다.

그리고 해방공간에서 한참 지난 시기이기는 하나 파성 시인이 5.16군사정권 시절 활동이 제약을 받자 1962년에는 한국문협 진주지부장을 1963년에는 한국예총 진주지부장을 잠시 맡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책임자는 그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해방기부터 그는 세르반테스의 소설 ‘동키호테’의 주인공처럼 자유분방했으며 저돌적인 기질도 있었다. 그래서 그의 호가 ‘동기’가 되었으며 이러한 기질은 아나키즘적 세계관에서 온 것이었으며 물론 그 기질은 일제 강점기 말기에 근 20년 동안 동경에 머물면서 체득한 부분도 있었다고 볼 수 있으나 거의 생득적인 허무주의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52년 5월 24일 마산 동중학교 교사직을 그만 둔 이후의 행적은 그의 회고기나 다른 글들에서도 분명하게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그 동안 시를 발표한 매체들이 부산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점에서 서울에서 피난 온 문인들과 어울려 임시수도 부산에 머물고 있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휴전협정이 조인된 지 3개월 남직 지났고 마산동중을 사임한지 1년 6개월 지난 1954년 11월 5일 그는 부산의 경남상업고등학교(현재 부경고등학교) 전임강사 그것도 국어 문예반 지도교사로 부임한다. 말하자면 정식 교사로 직을 떠난 그가 시인인 탓으로 문예담당 교사로 부임하여 그해의 경남상고 교지 <구덕>3호 발간을 지도하며 그곳에 시 <춘심>도 발표한다. 그의 부산생활은 6,25 직후의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단칸 방에 부인 전길순 여사와 가난하게 살았다고부산의 원로시인 박철석은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부산생활도 곧 끝나고 1955년 8월 1일 양왕용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는 남해군 창선면 창선중학교 교장으로 초빙된다. 동기 시인의 창선도 시절이 시인의 생애 가운데 경제적으로 안정적이고 정신적으로 가장 여유를 가진 때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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