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전시회에서 배우고, 느낀 점
서예 전시회에서 배우고, 느낀 점
  • 경남일보
  • 승인 2019.12.17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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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점석(경남작가회의 회원)
전점석
전점석

금년에는 10여 차례 서예 전시회를 본 것 같다. 그때마다 뜻밖에 생각지도 못한 좋은 글귀, 가슴으로 감동하는 멋진 문장, 정성스럽게 쓴 담백한 글씨를 만나는 기쁨이 있었다. 좋은 시와 글을 이렇게 한 자리에 모아놓고 각각의 시대적 배경을 모른 채 한꺼번에 읽어보니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느껴진다. 하나같이 속세의 이야기, 때 묻은 세상 이야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깨끗하고 맑은 소리를 듣는 시인, 묵객이 다다른 달관의 경지에 대한 글이 많다. 거의 단골이 몇 분 있다. 물론 쓰는 이들이 모두 그런 경지에 도달한 건 아니어서 작품에는 부러워 하는 마음이 담겨 있기도 하다.

유명한 시인들이 쓴 글의 설명문을 하나하나 읽어보았다. 대부분의 작품에는 홀로 대숲에 앉은 사람, 새벽에 일어나서 꽃을 보는 사람, 흘러가는 세월을 탄식하는 사람, 고운 님을 이별한 사람, 시름에 겨워 홀로 서 있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들은 나뭇가지마다 핀 매화꽃(孤山千樹摠梅花)을 보고, 산새가 지저귀는 평상에 누워서 책을 보기도 한다(移床竹塢臥看書). 난초향을 알고서 날아오는 나비를 보기도 하고(推窓時有蝶飛來), 님이 떠나고 없는 이곳을 찾아온 꾀꼬리(寂寞小鶯來)를 만나는 시인들의 글을 읽을 수 있다. 난간 밖 강물은 쓸쓸히 흐르고 있고(檻外長江空自流), 구름은 산허리에 가득하다(雲滿山頭樹滿溪). 새는 숲속에서 숨어 울고(好鳥隔林聲), 차가운 빗줄기는 밤새 대나무를 울리고(寒雨夜鳴竹), 수척한 기러기는 가을을 잃어 운다(瘦雁失秋鳴). 나뭇가지에 맺힌 이슬에서도 자신을 보고(數枝含露向人傾), 나뭇가지 사이에서도 가을 소리를 듣는다(秋聲在樹間),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산마루를 보고(半嶺雲氣白), 고요한 달밤에 홀로 누워 차 끓는 소리를 듣는(愛聽石鼎松風聲) 이분들의 여유가 부러운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설령 여유가 있다하더라도 누구나 차 끓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또 한 가지 특징은 교훈적인 내용과 성경, 불경이 심심찮게 있다. 예를 들어 오로지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잡념을 잊어버리고 절대 무차별의 경지에 이른다(心齋坐忘), 욕심이 적으니 마음이 맑아진다(寡欲淸心源), 듣지 못하는 것을 더욱 두려워 해야 한다(恐懼乎其所不聞),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歲月不待人), 성실하지 않으면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無物由不誠), 바다는 백 가지 넘는 냇물을 받아 들인다(海納百川), 나무를 심는 사람은 반드시 그 뿌리에 흙을 북돋아 주어야 한다(種樹者必培其根), 역경이 인생을 꽃피운다(動心忍性). 권력으로부터 얻은 부귀영화는 꽃병의 꽃(若以權力得者 如甁鉢中花)이라는 글이 있었다. 모두 좋은 글이다.

그런데 새로운 역사, 밝은 미래를 개척하는 내용은 많지 않다. 용이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오르듯, 호랑이가 쏜살같이 뛰어간다(龍騰虎躍)는 작품을 보긴 했지만 거의 역사적인 아픔에 공감하거나 대안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내가 글씨 쓰신 분들의 삶을 제대로 몰라서 마음에 와닿지 않은 점도 있는 것 같다. 간혹 자기 삶에 대한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자기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자기 목소리를 듣고 싶다. 모든 작품이 이래야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적어도 절반 정도는 세월호의 진실과 분단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이순신 장군의 <必死則生 必生則死>, 안중근 의사의 <見利思義 見危授命>, 신영복 선생의 <夜深星逾輝> 앞에서는 누구나 감동한다.

 
/전점석(경남작가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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