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 [101] 억새고원 사자평
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 [101] 억새고원 사자평
  • 경남일보
  • 승인 2019.12.18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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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 억새의 춤사위 '아름다운 유혹'
◇가을과 겨울 틈새를 물들인 단풍
 
 

입동이 한참이나 지났다. 많은 사람들이 산행이나 걷기가 어중간한 시기라고 선뜻 나서기를 꺼리는 계절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무렵의 산행을 무척 좋아한다. 가을과 겨울이 공존하는 세상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가을꽃들이 모두 진 시기지만 찬바람 속에서 가을의 끝을 지키고 있는 억새들을 응원하고 고원습지인 사자평의 늠름한 모습을 만나기 위해 명품 걷기클럽인 ‘건강 하나 행복 둘’(회장 이준기) 회원들과 함께 밀양의 재약산 사자평을 찾았다.


밀양 표충사 쪽에서 보면 천황산 서남쪽 험한 바위군으로 이루어진 봉우리의 생김새가 사자머리처럼 생겼다고 천황산 사자봉이라고 불렀고 그 아래 평원에 나 있는 억새가 마치 사자의 갈기와 같다고 억새평원을 사자평이라 불렀다고 한다. 표충사 쪽에서 바라본 천황산의 바위 무리가 정말 사자머리처럼 보였다. 백수의 왕이라 불리는 사자를 끌어들여 산에 대한 위엄을 부여하고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갖게 함과 더불어 옛사람들의 자연관에 대해 우러르는 마음도 갖게 하는 것 같았다.

재약산 산행길 초입, 활엽수들이 낙엽들을 융단처럼 깔아 놓았다. 탐방객들은 모두 왕이 된 기분으로 산행을 시작했다. 길은 낙엽융단이 깔려 있고, 먼 산엔 곱게 물든 채 겨울을 맞는 단풍들이 스스로 한폭의 수채화가 되어 온산을 멋지게 치장해 놓고 있었다.

완만한 계곡길을 지나자, 나무데크로 된 가파른 계단길이 탐방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무렵, 재약산 첫 번째 폭포인 흑룡폭포가 나타났다. 검은 돌이끼가 낀 암반 골짜기로 떨어지는 긴 물줄기가 마치 흑룡이 하늘로 오르는 것 같은 형상이다. 물줄기 양켠으로는 붉고 노란 단풍들이 손을 흔들며 흑룡의 승천을 응원해 주고 있는 듯했다. 멋진 풍경을 남겨둔 채, 다시 나무 계단길을 한참 걸어 올라가자 물줄기가 미약한 구룡폭포 있었다. 폭포 이름에는 용이라는 글자가 많이 들어가 있다. 그리고 폭포가 있는 곳은 풍광이 빼어나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아름다운 경치를 지닌 폭포 주변을 용이 사는 천국의 세계로 비유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폭포에는 용이 살지 않는다. 어쩌면 그 폭포를 보고 감탄할 수 있는 사람이 곧 폭포의 주인공인 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125만평의 고산습지 사자평

구룡폭포를 지나 산길과 가파른 나무계단을 번갈아 올라가자, 굵은 물줄기가 층층으로 떨어지는 층층폭포가 있었다. 사자평 넓은 고산습지가 머금고 있는 물이 사철 층층폭포 쪽으로 흘러내려 수량도 꽤 많은 편이다. 폭포수 아래 있는 소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다시 나무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곧바로 작전도로(임도)가 나왔고 그 평탄한 임도를 따라 20분 정도 걸어가니 억새들이 군락을 이룬 사자평이 나타났다. 125만평이나 되는 고산습지다. 반석을 깔아놓은 탐방로는 매우 운치가 있었다. 탐방로 양쪽으로 작은 바람에도 머리를 주억이며 탐방객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키 작은 억새들이 무척 다정스럽게 보였다.

1960년대 전국에 흩어져 있던 화전민들을 모아 거점지역을 마련해 관리하는 정부 시책에 따라 사자평 일대에 화전민촌이 형성됐다고 한다. 이후, 사자평은 화전민의 생계수단으로 억새밭을 태워 군데군데 개간을 하여 감자, 약초 등 고산작물을 재배하고 가축도 기르기 시작했다. 화전민들이 모여 살자 자연스럽게 자녀들이 생겨났고, 그 화전민의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해 산동초등학교 사자평 분교를 세웠다. 화전민 자녀들이 다닌 이 분교가 그 유명한 고사리학교다.

고원습지인 사자평을 탐방한 뒤 고사리학교 터를 찾아가 보았다. 학교 건물이 있었던 자리엔 억새와 잎이 마른 고사리, 잡목들이 무성하고 시골의 밭마당만한 운동장에는 아이들 대신 키 작은 억새들끼리 모여 볕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운동장 모퉁이에 표지석을 하나 세워 놓았는데, 경상남도 교육감이 남긴 비문에는 ‘교적비(校跡碑) 산동초등학교 사자평분교 터. 1966년 4월 29일 개교하여 졸업생 36명을 배출하고 1996년 3월 1일 폐교되었음’이라고 쓴 문구가 초겨울 햇살을 쬐고 있었다. 쓸쓸했다. 한때는 하늘 아래 첫학교인 이곳에서 사자봉만큼이나 높고 사자평만큼이나 넓은 꿈을 키웠을 아이들을 떠올리니 안타까운 마음이 억새꽃처럼 바람에 쓸렸다.

사자평을 끼고 있는 재약산과 천황산은 영남알프스의 주능선에 속한다. 경북 청도의 운문산과 가지산에서 시작해서 밀양의 천황산, 재약산, 울주의 영축산, 신불산, 간월산, 등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로 이어져 있는 이 능선은 수려한 산세와 풍광이 유럽의 알프스에 견줄만하다고 해서 영남알프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하늘에서 바라본 능선이 마치 태극무늬를 닮았다고 해서 태극종주 능선이라고도 한다. 영남알프스는 사계가 모두 아름답지만 가을철이 가장 빼어난 풍경을 연출한다. 그 연출자는 당연 억새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틈새 계절

피어 있을 땐 화려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 하나하나가 꽃으로는 큰 환대를 받지 못하지만, 떼로 몰려 있을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는 꽃이 억새다.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는 민중들의 삶과 닮은 것 같아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사자평을 빛나게 한 것도 억새다. 어쩌면 세상을 빛나게 하는 것도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나 유명한 사람 몇몇이 아니라, 바람이 불어가는 쪽으로 쓸리기도 하고 때론 바람에 맞서 저항하기도 하는 민중들일지도 모른다. 그 아름다운 꽃은 쉽게 시들지 않고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뀐 뒤에도 꽃으로 남아 있다.

사자평을 탐방하고 내려올 때는 작전도로를 이용했다. 내려오는 길은, 굽고 휘어진 길도 아름다웠지만 길을 걸으면서 바라보는 능선과 단풍의 풍광은 두 눈을 황홀하게 했다. 가을과 겨울의 틈새가 이처럼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사자평 탐방에서 만난 새로운 계절 하나,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촉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박종현(시인, 경남과기대 청담사상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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