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세의 번민을 불도로 승화시킨 청담스님
속세의 번민을 불도로 승화시킨 청담스님
  • 경남일보
  • 승인 2019.12.22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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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임식(LH 지역상생협력단장)

“갈증이 심했나 보군! 그러나 타는 마음은 물로 식힐 수가 없는 법일세”

“그럼 마음이 괴로울 때는 어떻게 해야 편안해 집니까?”

“마음을 이리 꺼내어 보게. 그러면 내가 고쳐 줄테니까”

일제가 강점한 진주 땅, 민족의 성지 진주성 안 호국사에 들러 염천(炎天)의 갈증을 씻으려는 청년 이찬호(이순호)는 주지 박포명 스님에게 뒷통수를 얻어맞은 듯 했다. 육체의 갈증을 씻은 청년은 이제 마음의 갈증에 번민이 시작되었다. “마음을 어떻게 꺼내 드리나?” 스님의 ‘마음의 법문’에서 청년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머리는 더욱 복잡해지고 인간의 원천적인 고통으로부터 해탈을 꿈꿨다.

불가에 입문하고 싶어 해인사, 백양사 등을 찾아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26세 때 고성 옥천사에서 부처님의 품에 안기어 출가했다. 법호를 청담(靑潭)이라 했다. 청담스님(1902~1971)은 출가 당시 이미 처와 자식들이 있었다. 어머니도 생존해 있었다, 그러나 마음의 번뇌는 결국 그에게 속세의 인연을 훌훌 털게 했다. 그 또한 인연이요 부처님의 법이라 했을 것이다.

청담스님은 진주시 수정동에서 성산 이씨로 태어나 진주 제일보통학교 시절 의협심이 남달리 강해 3.1만세운동에 가담하고 1주일간 옥고를 치뤘다. 진주공립농업학교(현 경남과기대) 시절 호국사 포명스님에게 ‘마음의 법문’을 들은 것이 평생 부처님의 품 안에 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차점이(車点伊,1905~1988)라는 여인과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있었지만 큰 뜻을 막지는 못했다. 남편의 출가를 묵묵히 지켜 본 차점이는 이혼수속을 위해 속가에 찾아 온 남편에게 ‘스님다운 스님이 되라’고 했다. 청담은 출가 4년 뒤 초청법회를 위해 고향을 찾았다. 이 때 가문을 이어달라는 생모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해 차점이와 하룻밤을 보냈다. 그러나 하룻밤 파계를 견디지 못하여 엄청난 고행을 시작한다. 만주에서 칼바람 맞고 푹푹 꺼지는 눈길을 걸을 때도 맨발이었다. 눈 위에 핏자국이 있으면 청담이 지나간 것이라고 했다.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시어머니의 구박을 받은 차점이는 그렇게 낳은 딸을 출가시켜 달라고 청담에게 편지를 썼다. 결국 청담의 도반(道伴) 성철스님이 딸의 머리를 깎았다. 딸은 비구니계의 원로 묘엄(妙嚴)스님이 되었다. 아버지의 영특함과 치열함을 닮은 묘엄은 뛰어난 율사(律師)였는데 수원 봉녕사 승가대학 학장으로 재임하다 2011년 80세 입적했다. 가족들의 한을 온 몸으로 견디며 살아간 차점이는 남편 청담스님이 1971년 11월 입적하자 인생의 기둥이 무너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보다 못한 딸 묘엄스님이 어머니를 절에 모셔 와서 손수 머리를 깎아 드렸다. 이미 차점이는 청담이 살아 있을 때 스님으로부터 대도성(大道性)이라는 법명을 받고 욕심과 걱정을 모두 내려놓으라는 충고도 받았다. 대도스님은 절에서 옛 남편의 뜻을 따라 염불과 독송에 열중하다 1988년 고단한 인생여행을 끝내고 무정하고 원망스럽던 남편 곁으로 갔다.

청담은 속세의 고통을 불도(佛道)의 바른 길로 승화시켰다. 스님은 출가 몇 년 후 피 끓던 27세 학인시절 부패한 불교를 혁신하기 위하여 서울 개운사에서 전국학인대회를 열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32세 때 묘향산 보현사에서 목숨을 건 용맹정진 끝에 득도하고 아주 뜻깊은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다. 35세 때는 동경3재(東京三才) 중 한 명인 춘원 이광수와 불교사상에 관한 격론을 벌이고 그를 불교에 귀의하게 한다. 60세 때는 서울 도선사 주지로 취임하고 불교정화에 관하여 시인 조지훈과 동아일보 지상논쟁을 벌였다. 불교정화운동과 왜색불교 퇴치에 앞장서고 조계종 총무원장과 종정을 모두 역임한 흔치않은 경력도 남겼다.

청담스님의 깊고 오묘한 사상은 한마디로 표현하기가 매우 어렵지만 그 요체는 ‘윤회사상의 존재론적 풀이’라고 본다. 윤회사상을 추상적인 화두에 그치지 않고 현실세계의 존재에서 풀이해 내는 것이다. 인간의 과거나 죽은 뒤 내세보다는 지금, 여기를 중시했다. 스님은 “사람이 산다는 것은 곧 죽는다는 것이다” “육신은 비록 죽어도 법신은 살아 있다” 등의 법문을 남겼다. 군종(軍宗)병사제를 실현하고 오늘날 <불교신문>에 해당하는 <대한불교>를 창간했다. 스님이 출가한 고성 옥천사와 서울 도선사에는 스님의 향기를 많이 느낄 수 있다. 열반 직후인 197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은 청담스님의 일생은 격동의 성장과정을 지나 명문으로 도약하는 모교 경남과기대의 역사와 많이 닮았다.

/최임식(LH 지역상생협력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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