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신 잃은 애석함으로
충신 잃은 애석함으로
  • 경남일보
  • 승인 2019.12.26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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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함안군가야문화유산담당관)
조정래 담당관
조정래 담당관

1624년 음력 1월 24일 이괄은 영변에서 금부도사 고덕상 등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1만 명의 군사로 출발한 이괄은 한명련을 구해서 반란에 가담시키고 도원수 장만이 주둔하던 평양을 피해 샛길로 한양으로 진군했다.

인조는 2월 8일 공주로 향하는 피난길에 올랐고 2월 10일 대궐에 입성한 이괄은 선조의 아들 이제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2월 11일 안령에서 도원수 장만의 관군에게 대패해 밤중에 광희문을 통해 이천으로 퇴각했으며 2월 14일 부하장수에 의해 이괄과 한명련의 목이 잘리면서 반란이 평정되었다.

당초 수천이었던 장만의 군대는 이괄의 대군을 추격하고만 있었는데 큰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휴복이라는 용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무를 겸비한 그를 별장으로 두고 있던 장만은 2월 1일 순천가수로 임명했으며 안령에서도 선봉에 세웠는데 용맹하게 적의 예봉을 꺾으며 대승으로 이끌었다.

이휴복은 3월 8일 진무공신 3등으로 책봉되고 순천군수로 부임하지만 그해 8월 28일 임지에서 병사하고 만다.

장만보다도 이휴복의 공이 더 컸음을 잘 알고 있던 인조는 간성을 잃었다고 애석해하면서 도백에게 상여를 호송케 하고 물품과 전례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공신들과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단결을 맹세하던 회맹제가 있었는데 1625년 4월 16일 인조도 이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이휴복이 없자 특별히 그를 위해 단서죽백의 교서와 함께 밭과 노비 등을 하사했다.

단서죽백 명문의 “한 번 싸움에 적군을 소탕해 임금의 수레 돌아왔다.” “승전의 실적은 그대를 힘입었다.” “대려의 맹세 함께했는데 저승으로 돌아갔으니 덧없이 진일(辰日)의 슬픔에 잠겼다.”라는 구절은 이휴복의 공훈과 인조의 애석함을 잘 보여준다.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도천재에 보관되어 오던 단서죽백은 1972년 2월 12일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됐으며 현재는 함안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대나무로 심을 넣은 가로 198cm, 세로 38cm의 비단에 한지를 입힌 후 글을 적었다. 이휴복이 공신이 된 사연을 비롯해 하사된 공신의 등급과 품계(정 5품)그리고 토지 노비 등 상급의 내용이 기록돼 있다. 뒤에는 강석기가 만들고 이무림이 쓰다라는 글씨가 있다. 전국에서 유일무이한 단서죽백을 보면서 새해를 시작한다면 한해의 복을 받지 않을까.

/조정래(함안군가야문화유산담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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