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길의 경제이야기] 패션 디자이너-엠마뉴엘 웅가로
[김흥길의 경제이야기] 패션 디자이너-엠마뉴엘 웅가로
  • 경남일보
  • 승인 2019.12.29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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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대학교 명예교수
FRANCE - JULY 10: Autumn Winter 2001/2001 Haute Couture Fashion Show : Ungaro-Details On October 7Th, 2000 In Paris, France. Emmanuel Ungaro (Photo by Alexis DUCLOS/Gamma-Rapho via Getty Images)
웅가로

엠마누엘 웅가로(Emanuel Maffeolit Ungaro)는 파시스트를 피해 프랑스로 이민 온 이탈리아 출신 2세로 1933년 프랑스 엑스 엉 프로방스(Aix-en-Provence)에서 태어났다. 9세부터 양복점 재단사인 아버지 밑에서 맞춤복 제작 기술을 배우기 시작하여 20세에는 맞춤복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자신의 진로를 패션 디자이너로 정한 그는 20대 초반이던 1956년 빠리로 이주하였다. 남성복 재단사인 크리스티아니 밑에서 일을 배우며 감을 익혀나갔다. 양복점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그는 디자인 인생에 전환점을 맞는다. 1958년 빠리 패션계, 오뜨 꾸뛰르(haute couture-최고급 맞춤 하이패션)의 거장이었던 스페인 출신의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Balenciaga-1972년 작고)의 조수가 되면서다. 그는 발렌시아가에게 6년간 배우면서 수석디자이너까지 올랐다. 그는 생전 발렌시아가로부터 ‘완벽주의’를 배웠다고 회상했다. 그 후 2년 간 앙드레 꾸레쥬(Courreges) 휘하에서 패션 감각을 가다듬게 된다. A라인의 실루엣, 미니 시프트 드레스, 반바지와 재킷의 앙상블에 더해진 여성의 아름다운 곡선미와 입체 재단 양식을 기본으로 한 아름다운 실루엣은 웅가로만의 색을 입고 화려하게 탄생한다.

그의 첫 컬렉션은 디자이너 앙드레 꾸레주의 영향을 받아 기하학적이면서도 로맨틱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이 후에도 색다른 매력을 선보이는 웅가로의 완벽한 테일러링은 스카프, 스키복, 향수 등의 다양한 분야로 퍼져나가며 명성을 이었다. 1965년에 그의 첫 작품발표회를 갖게 된다. 메탈릭 드레스, 레더 재킷과 핫팬츠 등의 파격적인 의상들은 패션계의 이목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웅가로는 1965년에 발렌시아가로부터 독립해 1965년 빠리 제17구 막 마온 거리에 자신의 패션 하우스를 오픈했다. 그는 독특한 작업 방식으로도 유명했다. 대부분의 디자이너는 스케치를 한 후 원단을 이용해 의상을 제작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디자인 아이디어를 먼저 원단과 핀으로 인체에 직접 재단한 후 스케치로 옮겼다. 그의 디자인은 여성의 인체 곡선을 아름답게 살린다는 평을 받았다.

웅가로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패션 스타일을 접목해 화려한 색채, 기하학적인 프린트, 과감한 무늬를 사용했고 여성의 인체 특성인 관능적 선을 살린 스타일로 유명하다. 그는 자신의 패션 특징에 대해 “감각적 강박관념”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그래서 그는 ‘색채의 마술사’ ‘프린트의 시인’이라 불렸다. 그는 생전 옷에 대한 그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누구도 옷을 입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살게 해야 한다” 웅가로는 1980년대에 특히 큰 성공을 거둬 재클린 케네디, 프랑스 여배우 꺄뜨린느 드뇌브, 마리엘렌 드 로스칠드 등 명사들이 그의 옷을 즐겨 입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매출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더 자유로운 패션의 창작을 위해 웅가로는 자사의 지분 상당수를 페레가모에 양도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5년 이후부터 그의 브랜드는 하락세를 이어갔다. 실리콘밸리 사업가 아심 압둘라에게 패션 하우스를 팔면서다. 그의 손을 떠난 그의 패션 하우스에선 유능한 디자이너들이 떠나갔다. 그 대안으로 2009년 미국 유명 여배우 린지 로한을 예술 감독으로 고용했다. 하지만 웅가로는 린지 로한의 디자인에 대해 혹평했다. “재앙이다” “패션 하우스가 ‘영혼이 없어지는 과정에 있다’”고 꼬집었다. 그랬던 웅가로는 “오트 쿠틔르 세계는 더 이상 오늘날의 여성들의 기대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고 지난 2004년 공식적으로 패션계에서 은퇴했다. 그럼에도 정교함과 동시에 정확성을 띄는 그의 디자인은 현재까지도 수많은 디자이너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며 살아있는 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색에 대해 이해를 못하거나 아니면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나 적당한 것이 미니멀리즘(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예술과 문화적인 흐름)이다. 그리고 미니멀리스트는 지적인 파시즘과도 같은 것이다.”와 같은 패션의 거장다운 명언들을 남긴 그는 투병 끝에 지난 12월 21일에 향년 8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경상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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