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플러스[234]지리산 불일평전
명산플러스[234]지리산 불일평전
  • 최창민
  • 승인 2020.01.02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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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일평전은 어머니의 품속처럼 따뜻하고 평화로운 곳이다. 산열매가 풍성한 숲과 듬직한 산이 있고 햇볕이 잘드는 텃밭이 있으며 오두막집 마당에는 사시사철 맑고 깨끗한 샘이 솟는다.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가면 꿈속이나 중국 산수에서나 볼 수 있는 천 길 낭떠러지가 나타나고 건너편 골짜기에는 은실로 짠 비단인 듯 하얀 폭포가 걸려 있다. 때로는 이 아름다운 폭포는 거대한 빙폭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엄청난 수량을 자랑하며 굉음을 쏟아내는 거폭으로 변신한다.

돌아서 나오면서 들를 곳은 동화책 그림처럼 예쁜 불일암이다. 콧구멍만한 터에 앉은 이 암자는 위태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시공간의 초월인듯 안정적이다. 옛사람들이 이상향, 청학동이라고 한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다.

이곳에 외로운 구름(孤雲)선생 최치원이 다녀갔을까. 최근 국립공원사무소는 불일폭포 맞은편 절개지에서 ‘완폭대’라고 새겨진 암각을 발견했다.

산 아래 고찰 쌍계사 대웅전 앞마당에 세워져 있는 국보 47호 ‘진감선사 대공탑비’가 그의 작품이고 쌍계사 입구 ‘쌍계석문’이 그의 글씨라고 하니, 고운의 불일평전·불일폭포 행차는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중국에서 돌아와 신라의 마지막 발악같은 정쟁과 혼돈의 난세를 감당할 힘을 잃은 그는 초야에 묻혀 살기를 원했으리라. 고운이 쓴 혁명적인 시무십조는 일부 받아들여졌으나 기득권의 벽에 부딪쳤음은 명약관화한 사실, 하는 수 없이 소요자방(逍遙自放)하던 차, 불현듯 중국에서 귀국초기 자신이 쓴 진감선사의 실제 탑비를 보고 싶었을 것이다. 벼슬을 떠나 유유자적 고독한 구름이 돼 떠도는 그의 행적을 돌이키며 상상하는 일은 흥미롭고 또 흥미롭다.

▲등산로:쌍계석문→쌍계사→갈림길→개울→구름바위→불일평전→ 장불재 갈림길→불일폭포(반환)→불일평전→쌍계사 회귀

▲쌍계사 입구 쌍계석문은 최치원의 쇠지팡이로 썼다는 철장서로 전해진다. 법계와 속계를 구분하는 경계라는 의미가 있는 곳이다. 새 도로가 나면서 한쪽으로 밀려 기능이 다소 퇴색됐다. 이 글씨를 보려면 차량을 세워놓고 민가가 있는 공터로 찾아들어가야 한다.

왼쪽 큰 바위에 쌍계(雙磎)오른쪽바위에 석문(石門)이라고 새겨져 있다.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이 ‘호리병 속 별천지 화개동’이라고 언급했다는 안내글과 함께 쌍계석문에 대해 영어 일어 한문으로 소개해놓고 있다.

석문에서 쌍계사까지는 매표소를 지나 10여분이면 닿는다. 과거 좁았던 길을 차가 다닐 수 있도록 정비해놓았다. 길을 따라 형성된 계곡의 물소리가 싱그럽고 청아하다.

쌍계사 대웅전 앞에 서 있는 진감선사 대공탑비가 눈길을 끈다. 피탄 자국이 곳곳에 나 있고, 깨지고 파손된 모서리를 쇠창살로 고정시켜놓았다.

최치원(857~?)이 중국에서 귀국한 직후 헌강왕으로부터 명을 받아 당에서 수학한 승려 진감선사(774~850)의 사상과 생애에 대해 비문을 직접 짓고 쓴 것이다. 888년의 일로 고운의 사산비명 중 가장 먼저 세운 것이다. 1200년 동안 멀쩡하던 탑비는 6·25 전쟁 통에 크게 파손됐다.

쌍계사 앞마당을 돌아 나와 옥천교를 건넌 뒤 팔상전 금당으로 향하다 오른쪽으로 틀어 본격적인 산길에 접어든다.

옥천교는 쌍계사의 옛 이름이 옥천사였음을 알려주는 흔적이다. 840년(신라 문성왕 2)중국에서 귀국한 진감선사가 절을 복원하면서 옥천사(玉泉寺)로 불렀으나 헌강왕이 쌍계사로 바꿨다.

‘불일폭포 2.3㎞, 삼신봉 8.8㎞’를 알리는 안내판에선 ‘여기서 멀고 먼 지리산’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지리산 주릉에 닿으려면 삼신봉(1289m)에서 세석 촛대봉까지는 8㎞를 더 가야하니까 산길을 장장 17㎞를 내달려야하는 멀고 먼 길이다.

등산로 옆에서 고찰, 명찰 명성에 맞는 고목을 만난다.

곧 불일평전과 국사암으로 가는 갈림길을 만난다. 국사암은 왼쪽 등성이를 넘어 300m지점에 있다.

일제 때 송진을 빼간 상처를 안고 사는 소나무 곁을 지나고 20여분 만에 계곡 위를 관통하는 작은 나무다리를 건넌다.

이 계곡에는 강도래 날도래 도룡뇽이 살고 있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민물·바닷물은 가리지 않으나 차갑고 깨끗한 물에만 산다는 옆새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 새우는 몸이 좌우로 납작하며 얕은 물속에서 옆으로 누워 꿈틀거리듯 움직인다. 민물에서는 계곡이나 흐르는 물의 낙엽이 쌓인 곳에 많이 나타난다. 숲속에서는 오색딱따구리 한 쌍이 현란한 날갯짓을 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출발 1시간 만에 환학대(喚鶴臺)에 닿는다. 둥글넙적한 바위로 최치원이 학을 불러 타기위해 앉았던 곳이라고 한다.

20분정도 더 오르면 불일평전이다. 한국의 이상향으로 불리는 곳이다. 서부경남지역의 직장인이라면 한번쯤 단합대회 명목으로 한번쯤 와봤을 단골 산행지이기도 하다.

넓은 평원에 계단식 텃밭과 야영장 흔적, 돌로 쌓은 소망탑과 연못, 허물어진 오두막집이다. 그 앞에는 지리산국립공원 쉼터다.

과거 이곳에는 석전 변규화 옹이 살았다. 긴 수염이 트레이드마크인 그는 1978년 이 낙원에 정착해 그야말로 신선(神仙)처럼 살았다. 피아골에 살던 또 다른 털보 함태식옹과 함께 지리산 지킴이로 불렸다. 산에서의 소란, 쓰레기 한조각 투기를 허용치 않는 호랑이였다.

2006년 겨울 어느 날 새로 지은 토굴에서 변고를 당한 뒤 투병 끝에 이듬해 6월 타계했다.

오두막 당호 봉명산방(鳳鳴山房)은 산정무한의 작가 정비석선생이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주인을 잃은 채 허물어져 인생무상, 쏜살같이 빠른 시간을 실감할수 있다.

변 옹이 손수 만들었다는 소망탑은 진안 마이탑사를 연상케 한다. 통일을 염원하면서 만든 연못의 이름은 반도지(半島池), 한반도지형을 본떠 만들었다. 재미있는 것은 변 옹의 거처인 오두막은 과거 우리영토였던 만주땅의 위치에 지어졌다고. 그림처럼 예쁘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능선을 넘어 불일폭포로 향한다. 입구부터 예사롭지 않다. 계곡은 천 길로 깊고 하늘은 가깝다. 이 골짜기에서 빙빙 돌면서 한참 내려가야 한다. 지리산 10경에 드는 불일폭포는 높이만 60m이다. 빙폭을 예상했지만 따뜻한 날씨 탓에 얼음은 온데 간데 없었다.

한여름에 비가 많이 내리면 마치 하늘에서 물 폭탄이 쏟아지는듯하고 하얀 물기둥은 어찌 보면 용이 승천하는 형세다. 폭포 밑 연못의 이름은 학추(鶴湫), 학연이다. 청학이 노닐었고 고운은 청학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녔다.

불일폭포를 바라보는 지점에서 어슴푸레하게 씌어진 ‘완폭대’ 석각을 찾았다. ‘불일폭포를 완상하며 노니는 바위’라는 뜻의 완폭대는 고운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지리산 국립공원사무소에서 완폭대를 발견해 세간에 화제가 됐다. 고운의 설화가 역사적 사실로 드러난 재미 있는 사례다.

완폭대를 돌아 돌담을 더듬어 불일암에 들어간다. 아담한 당우 2채가 반긴다. 이런 곳에서 수행하는 스님은 도의 경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마당에 서서 세상 밖을 내다보면 여기가 천국인 듯싶다. 나 역시 신선이 된다.

최창민기자 cchangmin@gnnews.co.kr

 
 
 
 
 
 
 
 
 
 
 
 
 
 
 
 
 
 
 
 
 
 
 
불일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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