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칼럼]윤동주 그리고 정병욱
[경일칼럼]윤동주 그리고 정병욱
  • 경남일보
  • 승인 2020.01.07 15: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명영(수필가·전 명신고 교장)
정병욱 가옥 마루 아래 윤동주 유고 보관장소

 

하동휴게소 지나 진월초등학교 정문에서 포구로 접어든다. 백두대간 출발점이며 종착지 망덕산, 그 아래에 펼쳐진 망덕포구는 다압, 구례, 곡성으로 가는 길목이다.

도로가에 수십 개의 다듬돌이 나열되고 돌 마다 시를 새겼다. ‘윤동주 망덕포구 시비’이다. 섬진강 하구에서 윤동주 시를 보게 될 줄이야!

섬진강을 멀찍이 밀어내는 방죽을 쌓고 안쪽에 왕복 2차선 포장을 하였다. 한참을 진행하자 공터가 나오고 양철집이 눈에 들어온다. 지붕은 얇고 경사는 완만하며 처마는 짧다. 미닫이문이며 창틀에 유리를 끼워 진열대와 마루가 보인다.

윤동주유고 보존 정병욱가옥. 이 건물은 윤동주 시인이 생전에 써서 남긴 원고가 온전히 보관되었던 곳이다. 그의 친우인 정병욱에 맡겨 1948년에 빛을 보게 되었다. 이 집은 정병욱의 아버지가 1934년에 매입하여 양조장 및 가정집으로 사용하였고 등록문화재로 되었다.

문을 밀고 들어가자 마루 구석에 앉은뱅이책상이 놓였다. 마루 널빤지를 들어내고, 항아리를 묻고서 그 안에 윤동주 시인의 원고를 보자기에 싸서 넣었다. 널빤지를 제자리에 끼우고 책상을 얹어 보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정병욱은 남해군 설천면 문항리에서 3.1운동에 가담했다가 보통학교 훈도를 하던 정남섭의 장님으로 태어나 부친의 근무지에서 유소년기를 보냈다. 진정·하동보통학교를 마치고 동래고보를 거쳐 1940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진정보통학교는 섬진강 건너편 소머리를 닮은 두우산 너머 금성면에 위치하는데 가까운 거리에 있다.

1940년 봄, 섬진강 하구에서 올라온 정병욱과 간도 용정에서 내려온 윤동주는 운명적으로 만난다. 신문을 손에 쥐고 기숙사로 찾아와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나와 같이 산보라도 나가실까요”하고 3학년인 윤동주가 조선일보 학생란에 실린 정병욱의 글을 보고 축하인사를 하는 것이다.

둘은 늘 함께했다. 인왕산을 산책하고 충무로에 나가 책방을 순례했으며, 문학과 예술을 논하고 세상을 걱정했다. 윤동주는 자신의 습작시를 정병욱에게 먼저 보여주었다. 1941년 윤동주는 19편의 시를 자필로 정리하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이름을 붙였다. 3부 가운데 하나를 정병욱에게 건넸다.

윤동주가 정병욱을 어떻게 대했는지 게시된 원고에서 읽어낼 수 있다. 세로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 쓰고, 다음 줄에 ‘정병욱 형(鄭炳昱 兄) 앞에’이라 적혀 있다. 다른 줄은 ‘윤동주 정(尹東柱 呈)’이라 되었다. 5년이나 어린 후배에게 兄이라 했고, 감사나 공로 등에 대한 성의나 인사 표시의 呈으로 나타내었다.

1943년 일본에서 윤동주는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돼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되고 이듬해 정병욱도 학도병으로 끌려간다. 원고를 어머니께 맡기며 “저나 윤동주 시인이 살아서 돌아올 때까지 소중하게 간직해 주십시오!”

둘 다 살아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조국이 독립되면 이 원고를 연희전문학교로 보내어 세상에 알리도록 해 달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떠났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돌아온 정병욱은 마루 아래 숨겨뒀던 윤동주의 시를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을 발간했다. 표지에 제목, 저자, 반가(頒價) 100원, 1948년 1월 30일 발행. 발행처 정음사 순으로 인쇄되었다. 특이하게 頒은 나눈다는 뜻으로 책값을 ‘반가’로 쓰고 있다.

윤동주의 나이를 뛰어넘는 우정, 배려하는 마음은 정병욱에게 보답하는 과제가 되었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결과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는 우정이 기적을 만든 것이다. 2020년은 온 누리에 우정이 충만하길 빌어본다.

안명영(수필가·전 명신고 교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