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5)8000m 세계 등반사
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5)8000m 세계 등반사
  • 경남일보
  • 승인 2020.01.27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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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중국이 마지막 남은 시샤팡마를 등정하면서 8000m급에 대한 국가적 경쟁은 막을 내렸다. 1970년대에는 8000m 고봉에 대한 등반은 국가적 지원과 대규모 인원을 동원하는 극지법에서 벗어나 소규모 인원으로 구성된 알파인 스타일이 등장했다. 알파인 스타일은 보다 어렵고 새로운 루트를 찾는 등반으로 기존의 등정주의에서 등로주의 시대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히말라야 거벽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대상 산도 8000m에서 6000~7000m급 산으로 다양해졌다. 알파인 스타일은 소규모 인원과 무산소, 단독 등반, 동계 등반, 8000m급 종주 등 극한에 도전하는 새로운 스타일이었다. 

  영국, 거벽 등반을 선두하다

히말라야 거벽 등반의 선두 주자는 영국이었다. 1970년 크리스 보닝턴이 이끄는 원정대는 3000m가 넘는 안나푸르나 남벽을 초등했다. 안나푸르나 남벽은 로체 남벽과 에베레스트 남서벽과 함께 히말라야 3대 남벽으로 유명하다. 영국팀들은 8명의 대원들과 셰르파들이 1개월 넘게 중앙의 빙벽과 록밴드를 어렵게 돌파하면서 6개 캠프를 설치하고 정상에 섰다. 돈 윌리언스와 두갈 헤스톤은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히말라야 거벽 등반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안나푸르나 남벽은 한국과 인연이 매우 깊다. 1994년 경남산악연맹 소속 합동대가 영국과 일본(1981년), 일본 동계초등(1987년), 국제합동대·러시아(1991년)에 이어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2011년 안나푸르나 남벽에 새로운 코리안 신루트를 뚫기 위해 도전한 박영석과 신동민, 강기석 대원이 눈사태로 실종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1970년 라인홀트 메스너와 동생 귄터 메스너는 벽 높이만 4500m에 달하는 세계에서 실존하는 최대의 벽인 낭가파르바트 남벽(일명 루팔벽)을 직등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정상에서 서벽인 디아미르로 내려오다 동생이 추락사하는 아픔을 겪었다. 동생의 죽음으로 등반을 포기하려고 했던 라인홀트는 히말라야 무대로 복귀해 최고의 알피니스트로 부상했다.

라인홀트 매스너 14좌 완등 책
일본 여성 산악인들의 눈부신 활약

1974년 일본 여성 산악인 나카세고, 우치다, 모리가 마나슬루(8163m)를 올라 세계 최초로 8000m급 등정에 성공했다. 마나슬루는 1956년 일본 원정대가 가장 먼저 올라 남성과 여성이 모두 세계 초등하는 대기록을 남겼다. 일본은 1975년 다베이 준코가 여성 최초로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오르며 세계 여성 산악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1978년은 히말라야 등반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등반이 이뤄졌다. 라인홀트와 피터 하벨라 콤비가 에베레스트에 최초로 무산소 등정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산악계에서는 8850m의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오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라인홀트와 피터가 무산소 등반 계획을 세우자 산악인들은 무모한 자살행위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서 돌아왔다. 이 등반으로 메스너는 ‘죽음의 지대’에서 무산소로 등반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 가장 위대한 승리였다. 3개월 후 라인홀트는 동생을 잃은 산, 낭가파르바트에 혼자 등반에 나서 정상에 섰다. 1978년은 라인홀트 매스너가 세계 최고봉 무산소 등정, 단독 등정, 연속적인 8000m 등정이라는 굵직한 기록을 남겼다.

‘라인홀트 메스너 vs 예지 쿠쿠츠카’

1980년대의 세계 산악계는 두 명의 슈퍼스타가 탄생한다. 라인홀트 메스너와 예지 쿠쿠츠카가 바로 그들이다. 이탈리아 출신의 라인홀트 메스너(1944~현재)는 1970년 낭가파르바트 등정을 시작으로 1986년 로체 등정을 마지막으로 14개 봉우리를 모두 오르는 최초의 산악인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첫 등반에서 동생을 잃는 비운을 겪었지만 1970~1980년대 들어 과감한 등반으로 세계 산악계에 많은 흔적을 남겼다. 1984년 그는 자일 파트너 한스 카머랜더와 함께 파키스탄 가셔브롬1·2봉 연속등정 기록을 세웠다. 가셔브롬1봉을 등정한 후 베이스캠프로 귀환하지 않고 곧바로 주변의 가셔브롬2봉 정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1982년 가셔브롬1·2봉, 브로드피크, 초오유 4개봉을 등정했다. 1985년 안나푸르나, 다울라기리에 이어 1986년 마칼루, 로체를 올라 14좌 완등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전 세계 언론들과 산악인들은 매스너의 14좌 완등을 ‘인간 한계를 뛰어넘은 위대한 승리’라고 극찬했다.

올림픽 메달을 거부한 메스너

메스너가 등산으로 가치를 인정받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기존 히말라야 원정이 대부분 국가적인 지원으로 이뤄졌다면 메스너는 진정한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개인적인 스포츠로 변화시켰다. 국제올림픽위원회는 1988년 2월 제15회 동계올림픽에서 8000m 14좌를 완등한 라인홀트 메스너와 예지 쿠쿠츠카에게 은메달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메스너는 “등반은 싸우는 상대가 없고, 심판도 없다. 단지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수영이나 스키 등은 경기지만 산을 오르는 것은 경기가 아니다. 산을 오른다 해도 루트가 달라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다”고 수상을 거부했다. 라인홀트 메스너의 산에 대한 철학을 잘 표현한 일화다. 그가 지금까지 세계 최고의 알피니스트로 평가받고 있는 것은 무산소 등정, 단독 등반, 알파인 스타일 등 새로운 도전과 살아서 돌아온 놀라운 생존력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위대한 산악인으로 평가하는 것은 등반 경험을 토대로 수많은 저서를 남겼기 때문이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산악문학상을 3회에 걸쳐 수상했다. 그는 등반을 기반으로 하는 작가로서의 뛰어난 글솜씨는 어떤 작가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그는 일반적인 등반기를 넘어 고독과 외로움, 죽음과 맞서 싸워야 하는 개인의 깊은 내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1986년 K2에서 한국원정대에 구조된 쿠쿠츠카(왼쪽 두번째)
폭주 기관차 쿠쿠츠카

1987년 폴란드 출신 예지 쿠쿠츠카가 시샤팡마를 마지막으로 두 번째로 14좌를 완등했다.<표 참조> 그는 메스너와 8000m 14개 봉우리 등정 레이스를 펼치면서 슈퍼 알피니즘을 탄생시켰다. 1979년 로체 무산소 등정을 시작으로 메스너에 비해 9년 늦게 출발했지만 간발의 차로 2등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쿠쿠츠카는 90%에 달하는 성공률과 4회 동계 초등, 10회에 달하는 신루트 등정 등 폴란드 최고 산악인으로 명성을 날렸다.

 
쿠쿠츠카 14좌 유작품
한국과의 아름다운 인연…추락사

생전 쿠쿠츠카는 한국 산악인들과 인연이 많았다. 그는 1981년 마칼루에 단독으로 올랐지만 악천후로 사진을 촬영하지 못했다. 그는 곧바로 등정 의혹에 휩싸였다. 정상 바위틈에 아들의 무당벌레 인형을 놓고 왔다고 항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82년 마칼루에 오른 허영호 역시 기상 악화로 역시 촬영이 불가능했다. 그는 사진 대신 정상 바위틈에 있던 작은 인형을 챙겨 내려왔다. 공교롭게도 허영호가 갖고 온 마스코트는 쿠쿠츠카가 남긴 무당벌레 인형이었다. 허영호와 예지 쿠쿠츠카는 무당벌레 인형으로 인해 등정 사실을 증명하는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한국과의 인연은 1986년에 이어졌다. 쿠쿠츠카는 K2 등정 후 하산하다 동료 피오트로프스키가 추락사했고, 화이트아웃을 만나 생사의 갈림길에 섰다. 다행히 그는 6800m 지점에서 한국 산악인들에게 구조돼 목숨을 구했지만 운명은 거기까지였다. 3년 후인 1989년 그는 로체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8000m 14좌 경쟁 레이스는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90년대 히말라야 원정이 대규모로 이뤄졌고 하나둘 8000m들을 오르던 산악인들은 14개 봉우리 완등에 불을 붙였다. 그 중심에는 엄홍길과 박영석이 있었다.

박명환 경남산악연맹부회장·경남과학교육원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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