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자료에서 유형문화재로…의미있는 명성찾기
문화재자료에서 유형문화재로…의미있는 명성찾기
  • 최창민 기자
  • 승인 2020.01.28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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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영남포정사문루 경남유형문화재 승격
그동안 보물·국보지정에만 매달려 격 상승 소홀
조 시장 치밀한 준비…최종단계 도약 ‘중간과정’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꼽히는 촉석루(矗石樓)와 조선시대 경남도관찰사가 업무를 봤던 관아 영남포정사문루(嶺南布政司門樓)가 경남도 유형문화재로 승격한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경남도 지정문화재는 유·무형문화재, 기념문화재, 민속문화재 4종류가 있고 그보다 낮은 단계가 문화재자료이다. 촉석루와 영남포정사 문루는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라거나 ‘100년의 문루’라는 명성에 비해 가장 낮은 등급인 문화재자료(文化財資料)로,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은 측면이 있다. 여기에는 그동안 상위 등급인 경남도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단계가 있음에도 곧장 보물·국보지정을 염두에 두고 강행한 행정착오도 저변에 깔려 있다. 이번에 2개의 문화재자료가 경남도 유형문화재로 한 단계 승격함에 따라 추후 진주시민들이 염원하는 보물·국보승격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수 없다. 기존 문화재자료보다 한 단계 상위급인 유형문화재로 승격한 것은 역사·예술·문화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따라서 2개의 문화재는 앞으로 보물·국보지정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원형복원의 난제가 남아 있긴 하지만 국보지정을 위한 중간단계로서 과정을 거쳤다는 의미도 담겼다.

이와 관련, 고영훈 경남도 건축문화재심의위원회 위원장은 “건축물에 대한 유형문화재 지정은 보통 100년의 하한연도(건축물의 최소연도)가 적용되는 게 통상적이지만 촉석루의 경우 이 년한을 충족하지 않지만 이미 진주성이 국가사적으로 지정돼 있고 그 안에 있는 건물로서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인정돼 유형문화재로 승격했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그동안 촉석루는 국보나 보물 지정 쪽에만 무게를 두면서 유형문화재 승격에 대해 다소 소홀했던 게 사실”이라며 “유형문화재 승격으로 지역의 중요한 문화재로 인정받고 나아가 보물이나 국보승격 가능성이 열린 것”이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문화재 위원들은 이번 심의를 통해 촉석루가 진주를 대표하는 문화재로 임진왜란 때 의기 논개가 낙화, 순국한 곳이기도 해 유적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평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박성진 진주성 관리사업소장은 “지난해 10월부터 2개의 문화재에 대한 경남도유형문화재 지정을 위해 조규일 시장을 비롯해 지역문화재 관계자 공무원들이 차근차근 준비한 것이 좋은 결과로 나타나 기쁘다”며 “한 단계 더 성숙하기 위한 작업의 기초를 마련했다는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진주성 전체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돼 있고 성 안에는 김시민 장군 전공비 등 유형문화재 5점, 기념물로 지정된 의암을 비롯해 촉석루, 의기사 등 문화재 자료 6점, 경남도 지정문화재 총 12점이 있다.

한편 도내에는 584개의 유형문화재가 등록돼 있다.

최창민기자 cchangmin@gnnews.co.kr

△촉석루=고려 고종 28년(1241)창건해 8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친 후 진주성의 남장대로서 장원루로 불렸다. 이러한 역사적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48년 국보 276호로 지정됐다. 하지만 6.25전쟁 때 비행기 폭격으로 불에 타 소실되면서 아름다운 제 모습을 잃었다. 1956년 국보에서 해제되는 아픔을 맞은 촉석루는 1957년 이승만대통령이 시찰차 진주에 왔을 때 지역민들의 재건요청이 받아들여져 진주 고적보존회를 중심으로 1960년 여덟번째 중건한 바 있다. 2013년 진주문화원과 향토사학자들을 중심으로 국보나 보물지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문화재청으로부터 ‘건축물 원형을 잃고 부속건물이 복원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가사적 승격염원을 이루지 못했다. 현 건물은 1973년 재건된 팔작지붕의 와가(瓦家)이며 1983년 7월 20일 문화재 중 등급이 가장 낮은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에 지정됐다.

△영남포정사=대변루, 망미루로 불렸다. 진주성 내 건축물로 경남도관찰사가 업무를 봤던 곳으로 관아 영남포정사의 정문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각지붕 목조와가 이층 누각건물이며 한말에 세웠다.

1618년(광해군 10)에 병사(兵使) 남이흥이 경상도 병마절도사의 집무청인 관덕당 내동문으로 세운 뒤 경상도 우병영의 관문으로 활용됐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로 시행됨에 따라 진주부가 설치되면서 진주관찰부의 선화당 관문이 된 후, 1896년에 경상남도관찰사의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경남도 도청을 부산으로 옮기기 전까지 도청 정문으로 사용됐다. 현재 문루 앞에는 수령이하개하마비(守令以下皆下馬碑)가 있다. 문화재 위원들은 조선시대 때 경남도관찰사가 업무를 처리하던 영남포정사 정문으로 당시 관아건축의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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