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속의 시간
달력 속의 시간
  • 최창민
  • 승인 2020.02.03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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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란 수필가
 
 

 

또 한 해가 이울었다. 한갓지게 새 달력을 걸면서 이런저런 바램도 걸어본다. 은행 달력을 걸어두면 부자가 된다기에 농협은행의 달력을 얻어왔다.

붉은 해가 떠오르는 전주 오목대의 풍경을 담은 그림 앞에 설레는 마음으로 서 있다.

사람들의 시간을 불러들이는 달력이 언젠가부터 귀해졌다. 손전화이거나 누리그물 속에 날짜별로 해야 할 일들을 짜 놓기 시작하면서 종이 달력이 자꾸 줄어들게 되었다고 한다.

하룻날 경남예술회관 그림 전시회장에 갔더니 연분홍 봉투에 넣어서 건네주는 조그마한 달력을 받았다. 컴퓨터가 있는 작은방에 걸어두고 흠흠, 그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 권은 어디서 얻을꼬…. 단골 제본소에 맡긴 일거리를 찾으러 갔을 때 책상이나 탁자 위에 올려놓고 볼 수 있는 앙증스러운 달력 두 권을 덤으로 얻었다. 겹으로 된 두꺼운 종이는 떼어내고 끝자락 가운데를 어림잡아 못이 들어갈 만큼 구멍을 뚫었다. 큰방의 손바닥만 한 액자 옆에 걸었더니 나보다 앞질러 냅뛰는 시간을 따라가지 못하고 바람만바람만 한다.

종이가 귀하던 오육십 년 전, 시골에서는 마을 이장이 집집마다 한 장짜리 달력을 나누어 주곤 했다. 온 장의 종이를 두 번 접어 자른 크기의 연두색 바탕에 맨 위 왼쪽부터 단군기원과 무슨 해, 태극기와 월력, 기원후의 몇 년이라는 획이 굵은 글씨로 써졌다. 일월부터 유월까지는 왼쪽에서 쭉 아래로, 칠월부터 십이월까지는 오른쪽이었다.

한가운데서 삼백예순날 우리 식구를 그윽하게 내려다보는 듯 지역 국회의원 사진이 점잖다. 사진 바로 아래 인사 말씀이 적혀 있고 다시 반으로 그어서 경축일, 명절과 국경일, 달마다 때를 정하여 놓는 농삿집의 일들이 한문으로 빼곡하였다. 어느 해는 활짝 핀 무궁화 꽃으로 우리나라 지도를 그려놓았다. 지도의 남쪽 어디쯤인가 밀짚모자를 쓴 농부가 삽을 들고 활짝 웃고 있는 옆에 누렇게 익은 벼와 오이, 감자, 무, 배추, 마늘, 고구마의 곡식이거나 채소 그림이 산뜻했다.

섣달그믐 무렵 달력 한 장을 받으면 울 할머니는 벽지를 바른지 하도 오래되어 얼룩덜룩한 윗목 벽에다 해소수까지 떨어지지 않도록 정성스럽게 붙였다. 그러고는 나에게 빨간색연필을 들게 하고 삼짇날이거나 초파일, 단옷날이거나 동짓날, 돌아가신 대대의 어른들 제삿날과 여덟 식구의 시간을 동그라미 안에 넣으라고 이르셨다. 눈을 감는다. 꾹꾹 쟁여 두었던 먼 시간들이 물무늬 져 넘실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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