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진주정신이다]3. 진주정신을 찾아서
[다시 진주정신이다]3. 진주정신을 찾아서
  • 경남일보
  • 승인 2020.02.06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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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규 (진주향당 고문)

조선후기 대표적인 역사가의 한 사람인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조선 초기부터 영조 때까지를 담은 ‘열조통기(列朝通紀)’를 지어, 우리 역사의 체계를 세우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순암은 그의 저서인 ‘동사강목(東史綱目)’ 서문에서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의 임무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역사가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계통을 밝히고, 찬역을 엄히 하고, 시비를 바로잡고, 충절을 포양하고, 전장(문물)을 자세히 하는 것이다.(史家大法 明統系也 嚴簒逆也 正是非也 褒忠節也 詳典章也)’

순암은 그 과정에서 ‘고증’을 중시하여 과거의 역사 기록을 단순히 취사하여 조술(祖述)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 역사를 통해 면면히 흐르는 정신(精神)을 읽어내고 다시 기록하는 일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역사에 대한 기록은 가벼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진주역사를 찾는 일은 천년 역사 속에 담겨있는 진주의 정신문화를 찾아내, 진주의 명예와 자긍심을 회복하는 일이기에 더 늦출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더불어 그동안 잊고 살아 온 진주 역사에 대해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이기도 하다.

진주인의 기질, 낙선호의
진주의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진주는 경상도를 대표하는 지역이다. 진주의 역사가 곧 경상도의 역사이므로 진주의 기질이 곧 경상도의 기질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진주로 대표되는 경상도민들의 기질을 평가하는 기록을 통해 진주의 정신문화적 가치와 평가의 일단을 발견할 수 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 팔도 사람들의 특징을 한 구절로 평(評)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조선의 기틀을 다진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은 조선 8도 사람들의 기질을 평하면서 경상도(慶尙道)의 기질을 ‘송죽대절(松竹大節)’이라고 표현했다.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굳은 절개’를 가진 도민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 조선의 실학자들은 전국 팔도의 지세(地勢), 지리(地理), 지형(地形)을 보면서 해당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인성(人性)이 서로 다르다는 지리인성론(地理人性論)을 주장했다.

조선 정조때 대사간을 지낸 윤행임(尹行恁, 1761∼1801)은 경상도민을 ‘태산교악 설중고송(泰山喬嶽 雪中孤松)과 같은 기질을 갖고 있다고 평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태산교악은 크고 높고 험한 산과 같이 웅장하고 험준한 기개를 말하며 일반적으로 덕(德)과 명망(名望)이 태산처럼 높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며, 설중고송은 눈 속의 고독한 소나무와 같은 추상같은 기상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은 조선 팔도의 지역적 특성을 볼 때 진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慶尙右道)의 사람들은 의(義)를 숭상하고, 경상좌도(慶尙左道) 사람들은 인(仁)을 지향한다고 했다. 특히 경상우도(慶尙右道) 사람들의 기질을 ‘낙선호의(樂善好義)’라고 평가했다. 즉 ‘착한 일 하는 것을 즐겨하고 의로운 일(사람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 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여송의 참모로 조선에 왔던 두사충(杜師忠)의 사위인 나학천(羅鶴天)의 팔도 인물평도 주목 할만하다. 중국 건주(建州) 출신으로 장인과 함께 조선에 귀화한 나학천은 경상도 사람의 기질을 ‘우순질신(愚順質信)’ 즉 어리석고 순하지만 참된 기질이 있다고 표현했다.

조선시대 지리학자들은 조선팔도의 땅에 대한 풍수지리적 해석을 하면서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생각해, 산천의 형세가 좋으면 좋은 인물이 태어난다고 하는 지리인성론(地理人性論)을 주장했다. 지형의 형세가 지역민의 성격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 것이다.

지리인성론을 통해 살펴 본 진주의 기질적 특성이 반드시 역사적 사건에 내재된 정신문화와 일치성을 갖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지역특성으로 인해 형성된 진주만의 독특한 정신문화는 진주의 역사적 인물을 통해 확인된다.

 
남명 조식
인물(人物)로 본 진주정신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은 진주의 정신사(精神史)에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학자이다. 남명은 삶 전체를 통해 권력의 장식품이 되기를 거부한 재야의 선비이면서, 백성을 공동체의 한 축으로 인식한 영남유학의 거두였다.

두 차례의 사화를 경험하면서 훈척 정치의 폐해를 직접 목격하고 평생을 산림처사로 자처했다. 오로지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매진하면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궁행을 중요시 여겨 ‘경(敬)’과 ‘의(義)’를 강조했고, 경상우도 학문의 특징을 이루었다.

남명은 사림정치가 시작되는 명종~선조 전대를 대표하는 학자로 평생 재야에 머물며 일생을 마쳤지만, 정치가 반드시 지위를 통해서만 구현되는 것이 아님을 직접 증명했다. 의(義)를 보고 행하지 않는 위선(僞善)을 타파하고, 진정한 선비상을 지행일치(知行一致)의 행동유학(行動儒學)의 실천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사의 난맥(亂脈)을 보고, 죽음을 불사하고 탄핵(彈劾)하고 나선 유명한 단성소(丹城疏)는 남명의 이러한 신념을 행동으로 표시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더불어 남명은 일상 생활에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경의정신(敬義精神)과 지행일치(知行一致)라는 실천학문에 힘입은 그의 제자들이 임진왜란이라는 나라의 위기상황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분연히 일어선 사실은 선비가 학문에만 힘쓰는 것이 아니고 배운 학문을 실천에 옮기는 일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남명의 호의정신을 이어받은 제자들은 진주를 중심으로 영남유학의 맥을 이어옴과 동시에 국난극복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동강 김우옹(지수), 각재 하항(수곡), 수우당 최영경(상대동), 신암 이준민(금산), 운당 이염(조동), 영모정 하진보(대곡), 영무성 하응도(대평), 조계 유종지(수곡), 무송 손천우(수곡), 부사 성여신(금산), 신계 하천주(대평), 백곡 진극경(백곡) 등이 그들이다.

남명의 제자들은 국난(國難)과 부정(不正)이 있을 때 마다 남명의 실천유학이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 임진왜란과 구한말 영남지역의 구국의병과 일제시대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남명을 주축으로 한 영남학파의 사상적 근간인 실천유학은 선도적 역할을 했으며, 이를 통해 진주가 민족정신(民族精神)의 발원지가 된 근원이 된다.

 
의기 논개 표준영정

진주는 민족정신의 발원지
진주는 역사 이래로 진주라는 이름으로 천년을 이어온 고도이자,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인재의 고장이기도 하다. 더불어 천년의 역사속에서 역사의 중심으로 자리해온 명실상부한 경남의 중심지이자, 민족정신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남명 조식선생의 호의정신과 제자들의 민족정신 발현과 함께 진주정신을 잇는 대표적인 인물은 의기(義妓) 논개(論介)이다.

의기 논개는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진주성을 지키던 7만 민관군이 전몰하자, 왜장을 의암으로 유인해 투신해 순국했다. 이후 진주사람들은 논개의 의열정신을 받들어 1629년 진주선비 정대륭이 의암 글자를 새기고, 1722년에는 의암사적비를 세웠다. 1740년 조선 조정은 조선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논개의 순국정신을 기리는 사당인 의기사를 세우도록 명한다. 논개가 의로운(義) 기생이 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몇 해 전에 대한민국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의기 논개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여인상’ 5위에 올라 의기 논개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확인하는 기회가 있었다. 더불어 의기 논개의 매서운 의열과 정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도 했다. 의기 논개가 단순히 진주정신의 맥을 잇는 진주의 논개가 아니라 민족정신의 맥을 잇는 조선의 논개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인 심산 김창숙은 ‘의기암’이라는 시를 통해 매국노를 준엄하게 꾸짖으면서 진주정신의 맥을 이은 논개의 의열정신을 칭송했다.

‘빼어나다 우리나라 역사에/기생으로 의암을 남겼구나/한심하다 고기로 배부른 자들/나라 저버리고 아직도 무얼 탐하는가’

논개의 의열정신은 구한말 본주(本州) 기생인 산홍(山紅)이 이어졌다. 산홍은 기생이라는 천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매수하려는 매국노 이지용을 꾸짖었다. 왜장을 안고 순국한 의기 논개의 정신과 닮아 있다.

산홍은 의기 논개의 충절과 정신을 이어가지 못하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담은 시(詩) 한 편을 지었다. 산홍이 의기사를 참배하고 지은 ‘의기사감음(義妓祠感吟)’이 바로 그것이다.

‘천추에 빛나는 진주의 의로움/두 사당과 높은 누각에 서려있네/세상에 태어나 뜻있는 일도 하지 못하고/풍악을 울리며 헛되이 놀기만 함이 부끄럽네’

과거 진주사람들은 의기 논개의 죽음을 헛되이 두지 않았다. 일반 백성부터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초월해서 논개의 의열과 충절을 기렸다. 그리고 마침내 ‘관기(官妓)’에서 ‘의기(義妓)’로, 다시 ‘진주 정신’의 한 맥으로 이어왔다. 본주 기생 산홍의 정신 역시 마찬가지이다.

 

논개의 정신을 잇다
국권이 침탈된 후 일제의 무단통치가 극에 달할 무렵인 1919년 3월, 진주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3월 18일, 진주에 걸인독립단이 나타났다. 이들은 태극기를 휘날리며 의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들이 떠돌아 다니며 밥을 빌어 먹는 것은 왜놈들이 우리의 재산과 인권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나라가 독립하지 못하면 우리는 물론 2천만 동포가 모두 빈곤의 구렁에 빠져 거지가 될 것’이라고 외치며 거리를 누볐다.

일본 헌병과 경찰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진주성을 비롯한 진주 곳곳은 만세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이때 한 무리의 아낙네들이 만세를 외치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우리나라 3.1독립운동 최초의 진주의 기생독립단이었다. 이들은 대형태극기를 앞세우고 남강변을 돌며 촉석루를 향해 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계속했다. 이들은 ‘우리가 이 자리에서 칼을 맞아 죽어도 우리나라가 독립되면 여한이 없다’고 소리치며 조금의 동요나 굽힘이 없었다. 이들의 독립운동은 의기논개의 나라사랑 정신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이후 진주에는 학생의거(3월 21일)를 비롯해 미천면의거(3월 22일), 수곡면의거(3월 22일), 문산읍의거(3월 25일), 정촌면의거(3월 18일), 유림의거(5월) 등이 연이어 일어났고 참가한 인원이 무려 3만여명이 넘었다. 남명과 임진왜란 의병, 의기논개, 산홍, 걸인·기생독립운동은 지금도 진주정신을 대표하는 인물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정수리에 퍼붓는 냉수 한 바가지
‘새벽잠 끝에 정수리에/퍼붓는 냉수 한 바가지/우리 나라 정수리에 퍼붓는/이 정갈한 냉수 한 바가지/晋州에 와 보면/그렇게 퍼뜩 精神(정신)이/들고 마는 것을 안다.’

민족시인 허유(許洧,1936∼)는 ‘진주(晋州)’라는 시에서 진주를 ‘새벽잠 끝에 정수리에 퍼붓는 냉수 한 바가지’처럼 그야말로 제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듬어야 할 곳이라고 표현했다.

진주정신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지금이라도 진주정신을 찾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것이 진주정신이 뿌리내려 있는 진주 땅을 밟고 살고 있는 우리의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황경규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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