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상절리
주상절리
  • 경남일보
  • 승인 2020.02.17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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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란 (수필가)
손정란



점심 때 구워먹으려고 얼려두었던 조기 한 마리를 꺼내 쌀뜨물에 담가 놓고 컴퓨터를 켰다. 오늘의 날씨는 작은 먼지가 온 나라를 뿌옇게 뒤덮을 것이라 전한다. 갑갑하여 모두숨을 쉬며 누리그물 속에서 바다를 찾는데 파도가 꿈틀거리며 밀려왔다. 거칠게 휘감는 파도 소리에 몇 해 전 문학 기행을 갔었던 경주의 양남바다가 굽이친다.

풍덩, 물속으로 들어가 개구리헤엄을 치며 가까이 가본다거나 넘실넘실 돛단배 하나 띄울 수도 없다. 멀찍이서 문무대왕릉을 곁눈질하고, 읍천항과 하서항 사이의 파도 소리 길을 걸어 나오다 촘촘하게 주름진 주상절리 앞에 섰다. 내가 모르는 수천 년 전의 시간을 되짚어보려니 물무늬에 그림자가 내려앉는다.

거기, 오랜 가뭄에 논바닥이 갈라지듯 파도에 깎인 돌기둥이 부채 모양으로 좍 펼쳐져 있었다. 마구 솟구치며 흘러내리는 붉은 마그마를 쏴아 철썩, 하얀 거품이 들렁들렁하게 식혔을라나. 파도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멍석말이로 몰려왔다가 내달린다.

그 많은 돌기둥이 저절로 가지런히 누운 것에 놀랐고 이 시대까지 남아 있는 자취로서 갖는 의미를 헤아려본다. 물너울이 돌 틈에 거칠게 부딪쳤다가 빠져나간 자국이 촘촘히 접혀 양남바다의 역사로 새겨졌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호롱불 아래서 누비바느질로 지은 여자 한복 두루마기가 되살아난다. 옷감은 모본단이었다. 젓가락 하나 만큼의 너비를 가늠하면서 씨실 한 올씩 튕겨 바늘이 오르내릴 수 있는 길을 내었다. 누빌 길에 뚜벅뚜벅 발자국을 찍듯 똑같이 맞추어 바늘땀을 떴다. 명주실로 뜬 바늘땀들은 도드라졌다.

풀 먹인 삼베옷이 스칠 때마다 밀가루 내음이 났다. 또 하루를 살아야 하는 첫 새벽이 열린다. 축축한 바위에 둥지를 튼 제비갈매기가 날갯짓 하듯 똬리와 물동이를 들고 삽짝을 나선다. 하세월에 꼿꼿하던 허리가 굽어지고 흐려지는 눈가에 잔주름을 잡아 한 땀 한 땀 홀로 저물어가는 어머니의 주상절리. 돌기둥의 선들은 촘촘한 바느질로 누벼 박은 듯 뚜렷한데 다 내어주고 비워낸 어머니에게 어제 기억들은 멀고도 깊다.

생명의 숨결이 스며들었을까. 파도의 시간을 접었다 펴고 있는 틈새를 살피다 쌀뜨물에 담가 두었던 조기를 생각한다. 점심상을 차린다. 언제였던가. 지금 내 나이 무렵의 어머니가 사람은 나이가 들면 밥 심으로 살아간다고 하신 말씀. 야무지고 푸지게 차려 먹는 밥 심으로 어느 날은 힘차고, 하룻날은 흔들림이 없고 어떤 날은 부드럽게 세상을 헤엄쳐 가는 등뼈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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