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문 곁에도 봄이
사립문 곁에도 봄이
  • 경남일보
  • 승인 2020.02.18 15:09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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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대 (수필가)
 오늘은 우수(雨水), 대동강물이 풀리다가 도로 얼어붙을 정도로 꽃샘추위가 만만치 않다. 드물게 춥지 않은 올겨울이었지만 동장군이 물러나기 아쉬운 모양이다. 그래도 동으로 비켜선 사립문 근처 민들레는 꽃망울을 피운다. 겨우내 차가웠던 땅에는 생기가 돈다. 봄바람이 지나가는 사립문, 생각만으로 정겹다. 사립문은 대나무 울타리에 곁붙어 있어도 그럴듯하고 돌담이 지나가다 머문 곳에 생뚱맞게 달려 있어도 멋쩍지 않다. 그냥 들고 열어도 괜찮고 밀고 들어도 좋다. 그런 문을 들어서면 눈까지도 새까만 하릅강아지가 알지 못하는 방문객에게 물색없이 꼬리를 흔들다가 뒷다리 사이로 꼬리를 감추고 깨갱하며 마루 밑으로 내처 도망할듯하다. 사립문은 해마다 새로 만들어야 하나 주인 양반은 농사철엔 농사일 바쁘고 농한기엔 술추렴 바빠, 수삼 년을 그럭저럭 지내다보니 낡고 쓰러져 제구실을 못해 옆집 고양이나 앞집 씨암탉이 수시로 드나들며 문 옆 강아지만 애태운다.

곁자리 민들레가 살고 싶은 곳에 살면서 마음껏 꽃을 피우듯, 사립문도 오는 객(客)을 경계하거나 허락 없이 찾아드는 도둑을 막겠다는 의도 따위는 전혀 없는 수수밭의 허수아비 같다. 생긴 것도 엉성하지만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집안 소식을 고해바치는 품새로 삐딱하게 앉아 그저 지나가는 눈길조차 스스럼을 없앤다. 사람들은 사립문이 닫혀 있으면 집안이 훤히 보여도 그냥 들어가기 뭣한 듯 괜히 큰 기침을 해가며 사립문 존재감을 지켜 주었다. 사립문은 밀면 미는 대로 들면 드는 대로 거부도 저항도 못했지만 가난한 민초들 삶이 그러했듯 자신의 처한 처지대로 비바람 찬 서리를 맞으면서 부스러기가 될 때까지 제자리를 지켰다.

새끼금줄이 붉은 고추라도 끼고 사립문에 척 걸쳐진 날엔 오가는 사람들에게 제법 큰소리를 치고 싶었을 것이다. 커다란 덩치로 오갈 때마다 자신을 무시하던 외양간 누렁이가 큰아들 학자금에 팔려가면서 두고 간 워낭이라도 얻어 달면, 사람이 드나들 때야 으레 그랬지만 어둠이 몰고 오는 소슬바람에도 딸랑이며 마냥 신나 했다. 그래봤자 사립문 옆 묶인 강아지는 눈만 휘둥그레지고 솟을대문 집 검둥이는 도둑 드는 소리인줄 알고 애타 짖어댔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냐. 밀면 밀리기만 하던 사립문이 산 강아지를 놀려 먹었으니…. 이제 사립문을 보기 쉽지 않다. 있을 땐 눈에도 들지 않던 사립문이 사라져가니 가뭇없이 그립다. 올 봄은 하얀 민들레가 까닭 없이 자리 잡은 사립문가에 살던 사람들이 나라살림을 맡았음 하는 소망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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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이아빠 2020-02-19 11:39:58
사립문에 정취가 물신 풍겨나는
아름다운 글입니다

작가의 새심한 눈길과
단어에서 오는 정겨움이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하늘먼당 2020-02-19 07:05:45
겨울이 다시 온 듯
쌀쌀한 아침

사라지고 멀어져 간 것들에 대해
서운함이나 아쉬움을 넘어서
온기어린 시선과 따스한 감성으로
우리 곁에 소환시켜준 "사립문"
정말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