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 잔의 생각
차 한 잔의 생각
  • 경남일보
  • 승인 2020.02.19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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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대 (진주시 주택경관과 계장)
박영대

 

차 한 잔을 우려낸다. 찻잎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똘똘 뭉친 찻잎들이 뜨거운 물에 자신의 몸을 풀어헤친다. 그동안 숨겨두었던 비밀을 누설하고 있다. 몇몇 찻잎들은 끝까지 자기의 몸을 말아 풀어낼 생각을 않는다. 아마 더 깊은, 좀 더 뜨거운 불에 자신의 상처를 댄 탓일 것이다. 상처가 깊을수록 드러내기가 힘든 것이다. 하지만 뜨거운 물은 상처를 오롯이 안을 것이다. 찻잔에 풀어지는 찻잎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시간이 내 마음을 치유하는 시간과도 같다. 가만히 찻잔을 따스한 찻잔을 양손으로 감아쥐면 찻잔과 나와 하나가 된 듯하다.

찻사발의 동그란 선을 따라 차향이 머무르면 세상이 둥글게 돌아가는 것 같다. 둥글다는 것, 둥글게 퍼져나가는 것에 의해서 마음을 위로받는다. 나의 상처도, 우리 모두의 상처도 차츰 아물어 간다.

깊게 우러나는 차향처럼, 묵혀 두었던 시간 동안의 그리움, 슬픔, 괴로움과 견딤의 시간으로 인해 삶은 더욱더 깊고 향기로워질 것이다. 차의 상처가 깊은 맛을 내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상처가 없으면 향기가 나지 않는다. 생의 상처를 온전히 받아들여서 우려낼 수 있는 삶의 기법을 개발하면 살아가는 맛을 좀 더 깊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밀려오는 슬픔, 아픔, 기분 나쁜 생각들은 누대에 걸친 상처의 다른 모습에 불과하다. 그것을 회피하거나 거부하지 말고 온전히 받아들이자. 뜨거운 물에 깊은 상처를 녹여서 우려내자. 모두가 삶의 맛이므로 온전히 맛볼 수 있도록 하자.

하지만, 상처도, 상처로 인한 많은 생각도 다만 그러한 것임을 알고 거기에 빠져 허우적거리지는 말아야 한다. 언젠가는 상처도 아물 것이며, 상처로 인한 생각들도 맑은 마음으로 대체가 될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되어온 이 생각은 본시 나의 것이 아닌 것. 기억, 추억, 흔적들 또한, 지나간 한 사건에 불과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생각은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과 같다. 흘러간다는 것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한번 일어난 생각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재생될 뿐이다. 끊임없이 타오르는 촛불처럼 순간의 연속만 있을 뿐이다. 순간순간을 깨어서 바라보아야 한다. 깨어 있지 않으면 흘러가는 생각들을 나라고 고집하게 된다. 춤추는 생각이 자신이라고 착각해서 고통과 아픔과 슬픔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된다. 그렇게 살아가지 않으려면 현재의 순간으로 자꾸 돌아와야 한다. 끊임없이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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