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팔순 언덕에서’ 우촌(牛忖)최태문
[기고]‘팔순 언덕에서’ 우촌(牛忖)최태문
  • 경남일보
  • 승인 2020.02.20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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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만 보고 세월 따라 걸어온 길, 이제 팔순의 언덕에 올라섰다.

오랜 세월, 돌아보니 굽이굽이 사연도 많았다. 초등학교 시절, 공책에 그림을 그리다 선생님께 꾸중을 들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6·25전쟁 때 남강의 촉석루가 며칠간 불타는 모습을 보며 슬퍼한 것이 눈에 선한데, 미국의 구호물자인 가루우유로 배를 채우다 설사를 만나 혼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집이 있는 진주 비봉산 쪽에서 남강을 건너 칠암동까지 6년을 걸어서 진주 남중·농고에 다니면서 그림 그리는 일을 쉬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간절한 마음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아마도 작은 소질과 열정이 있었던 것 같다. 내고(乃古) 박생광 선생님의 눈에 띄어 그 문하생이 된 것은 숙명이었을까. 내고가 서울의 수유리로 떠 날 때까지 열심히 지도를 받았으나 기초가 부족해 매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나는 그때 선생님의 셋방살이를 보고 화가의 길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재산을 날렸다. 성정(性情)이 유(柔-)하셨던 당신은 남에게 보증서는 것도 후했다. 가족들은 생활고에 시달렸고 나의 대학진학은 물거품이 돼버렸다. 생계유지를 위해 금은 세공법을 배웠다. 정교함이 생명인 금은세공과 그림그리기가 어떤 관련이 있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한번 잘 살아보겠다는 독한 마음만 남았다. 그때도 그림그리기는 쉬지 않았다. 십여 년간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진주시 대안동 청구서점 옆에 금방을 개업했다.

‘사장님’ 소리를 들어서 뿌듯했고 기분이 좋았다. 독신인 나는 그 시기에 결혼을 했다. 당시 대개 그렇듯이 아버님의 말씀에 따라 중매결혼을 했다. 아들 두명이 태어났을 때 한없이 기뻤다. 독신의 굴레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행복하고 또 행복했다. 나에겐 행운만 있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974년 설날, 금방이 털렸다. 청천벽력 같은 일, 지금까지 노력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낙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몇일 간 가슴으로 깊게 울었다. 어느날 정신이 들었다. 내가 가족을 위해 할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질 수단이 무엇일까. 의외로 답은 내 곁에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림뿐이었다. 최 사장에서 우촌선생으로 운명이 달라진 순간이었다. 하느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고 살길을 열어 주었다.

도둑을 맞았던 그해 일본전시회가 성사됐다. 재기의 기회가 열린것이다. 전시 작품에 대한 호평이 쏟아졌다. 그림이 많이 팔렸다.

3년 뒤인 1977년 제11회 경남도 미술대전 8개 부분에서 최고상인 금상을 받았다. 어미 소와 새끼소가 어울려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었다.

평화와 사랑이 주제였다. 그런 뒤, 나는 소를 주제로 그림을 많이 그렸다. 전국적으로 ‘소의 작가’라는 이름이 붙었다. 특별히 소를 그리는 이유는 어릴 때부터 황소를 많이 봐 왔기 때문이다. 소는 너그러워 보인다. 그러면서 순종한다. 먼 하늘을 응시하는 큰 눈망울은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을 깊이가 있다. 내가 그토록 하고 싶어 했던 그림 그리는 일이 직업으로 연결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2남 2녀를 더 얻어 4남2녀 다복한 가족을 이뤘다. 시련 뒤에 나는 그림그리기에 더 매진했다. 지금 나는 화가로서 살아온 세월, 팔순의 언덕에 서 있다. 소의 작가, 여기에 오기까지 많은 굽이가 있었지만 큰 변곡이 없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특히 주변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화가의 호는 생김새 성격 철학 인생관이 어우러져 탄생한다.

그래서일까. 나의 호는 우촌(牛忖)이다. 앞으로 나는 소를 1000점 그리고 싶다. 나를 키워준 고향 진주에 감사하며 사랑과 봉사로 긴 세월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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