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기억의 전쟁을 넘어 고통의 연대를 향하여
베트남 전쟁, 기억의 전쟁을 넘어 고통의 연대를 향하여
  • 경남일보
  • 승인 2020.02.26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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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식 (진주교대신문사 편집국장)
전쟁이 끝나도, 기억의 전쟁은 계속된다. 잔인하게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살육의 과정이 기억되기 위한 전쟁을 치러야 한다. 그것이 소중한 이들을 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의 명예를 지키고 죽인 자들의 죄를 남기기 위한 싸움, 바로 기억의 전쟁이다. 1999년, 한겨레21 구수정 통신원의 보도는 베트남 전쟁에 관한 우리 사회의 금기를 깬 것이었다. 그녀는 베트남 중부지역에서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학살을 최초로 폭로했다. 잊혀져 가던 기억들이 소환됐다.

한국인들이 넘쳐나는 휴양지 다낭에서 조금 떨어진 퐁니·퐁넛 마을에는 죄악 증거비가 있다. 비석에는 74명의 이름과 성별 그리고 생년월일이 새겨져있다. 노인도 갓난아기도 난 날은 달랐지만 모두 한날 비명횡사했다. 이 마을은 미군이 인정한 안전지대였다. 그랬기에 저항할 틈도 없이 학살은 이루어졌다.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또 다른 증오비는 기록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사건들은 한국은 물론이고 베트남 내부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베트남전은 한국인들에게는 경제 성장을 이끌었던 과거의 잊힌 역사이며, 베트남인들에게는 영광으로 점철된 승리의 역사일 뿐이었다. 그 속에 어느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학살의 기억이 비집고 들어 갈 곳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잊혀졌다고 역사적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난 50년간 한국 정부는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해 한베평화재단 등 여러 시민단체의 진상조사 요구에도 ‘확인할 수 없다’는 입장만을 고수해 왔다. 학살 피해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날 그들의 삶에 분명히 일어났던 일이 공식 기억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사과도 보상도 그리고 진정한 추모도 그날의 기억에 대한 인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그들의 기억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 ‘고통의 연대’가 해답이 될 수 있다

한국 정부의 입장은 베트남과의 복잡한 외교적 문제가 연관돼 있을 수 있다. 베트남 정부 또한 사과 및 진상조사를 요구한 적이 없다. 그래서 시간이 걸리는 것이라면 개인의 차원에서라도 올바르게 기억해야 한다. 윗세대의 죄를 아랫세대가 모두 짊어질 수는 없다. 하지만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기 위해, 적어도 우리는 윗세대의 과오를 똑바로 마주해야한다. ‘고통의 연대’, 그것은 복잡한 국제 정치적 문제를 제쳐두고, 그날의 피해자들에게 오늘의 우리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최소한의 일이다.

정우식 (진주교대신문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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