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500)
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500)
  • 경남일보
  • 승인 2020.02.27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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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창선도 출신 김봉군과 양왕용 교수의 문단 이력 읽기(9)
지금부터는 양왕용 교수의 이야기로 들어간다. 양 교수는 한국시학(2019 가을호)에 ‘나의 삶 나의 문학’ 코너에 ‘시인의 길 교육자의 길 그리고 학자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회고의 글을 실었다. 필자는 이 글 줄거리를 기본으로 하여 시인이자 교수로 일한 양왕용의 이력을 살펴볼까 한다. 김봉군 교수는 진주고등힉교 30회 졸업생이고 필자는 31회, 양 교수는 입학은 32회로 했다가 몸이 아팠던 관계로 33회로 졸업한 시인이다.

양왕용 교수가 33회가 되면서 그 시기 동급생 문인에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수필가 정목일이고 다른 한 사람은 시조작가 이영성이었다. 양 교수는 1943년 남해군 창선면 상죽리79번지에서 태어났다. 창선도는 남해도와 같이 남해군을 구성하는 탓으로 섬 중의 섬이라고 불리어졌다. 양 교수 유년시절에는 삼천포와 하루 한 번씩 여객선이 오가는 정도의 시골이었다. 양 교수의 부친은 30년대 중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공장에 다니면서 야간중학을 졸업하고는 건강이 여의치 않아 귀국하여 회복한 후 결혼했다. 일제가 패망하기 전 일본에서 쓴 일기가 문제가 되어 남해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기도 한 민족주의자였다.

6.25전쟁 이후에는 광복 직후부터 다니던 면사무소를 그만 두고 행정서사 일을 시작하여 주민들의 각종 민원을 대행하였으며 신문사 지국을 하는 한 편 양 교수가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에는 다른 사람이 하던 면내 유일의 서점을 인수하여 신문 돌리는 일과 책 파는 일을 겸하였다. 양 교수가 서점을 시작하기 전부터 책읽기를 좋아하자 부친은 동화집과 소년잡지 ‘소년세계’와 ‘새벗’ 등을 사주었다.

양 교수는 창선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역시 면내의 유일한 사립 창선중학에 입학하였다. 그 당시 교장 선생은 진주 출신 이경순(1905-1985) 시인이었다. 그런데 중학교 1학년 때에 교장선생께서 역시 진주에 사는 개천예술제 창시자인 설창수(1916-1998) 시인을 초청하여 전교생을 교실 세 칸을 틔운 강당에 앉혀 놓고 문학 강연을 하게 했다. 양 교수는 맨 앞자리에 앉아 메모를 하면서 막연히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는 한 편 ‘학원’지를 구독하였고 친구들과 문집을 만들 계획도 구체적으로 세웠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고등학교는 1959년 진주의 진주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하숙을 창선중고등학교 교장을 그만 두시고 고향 진주에서 경남일보 논설위원을 하시던 이경순 시인 댁에 하게 되었다. 양 교수는 한글 맞춤법에 서투시던 이경순 시인의 시와 산문 초고를 교정하면서 시인의 꿈을 키웠다. 양교수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2학년 때에는 4.19혁명이 일어났고 3학년 올라간 1961년에는 5.16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선 어수선한 시절이었으나 양 교수는 나름대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시 습작도 열심히 했다. 그러다가 몸이 아파 1년을 휴학했다.

그러나 이 1년의 휴학시기가 양 교수에게는 오히려 큰 도움이 되었다. 1년 동안 문학에 대하여 고등학생 수준을 능가하는 연마를 했다. 다시 복학한 고3 때에는 교내 백일장에 입상하여 그해 개천예술제 백일장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학 대학 진학 준비로 습작을 계속하지는 못하고 졸업하면 중등학교 교사가 보장되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로 진학을 했다.

대학시절 복음고등공민학교 교사가 되었다. 계명대 영문과 교수인 김태한 장로가 운영하던 복음학교였다. 교사는 주로 경북대 사범대 기독학생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양 교수는 2학년 국어를 맡게 되었는데 교회도 김태한 장로가 나가던 남산교회를 선택하여 다녔다. 대학 3학년때는 현재 양 교수의 아내인 최숙희 권사(사대 수학교육과)도 복음학교에서 만났고 학부 졸업후 대학원 석사 과정 시절에는 대륜 중고등학교 강사로 나가면서 복음학교 기획직책으로 계속 봉사했다.

양 교수는 경북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부산으로 내려와 잠시 초량교회에 출석하다가 70년 아내와 결혼 후 부산대학교 근처 소정교회에 출석하여 주로 각급 교회학교 교사로 부장으로 일했는데 86년부터 장로로 뽑혀 봉사하다가 2003년 해운대 신시가지로 이사하면서 장로를 사임하고 수영로교회로 옮겨 지금은 평신도로 성가대원으로 일한다.

양 교수는 문단 데뷔 과정에서는 행운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63년 입학한 대학에 김춘수 시인이 교수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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