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10) ‘송곳 봉우리’를 세계에서 처음 오르다
신들의 정원(10) ‘송곳 봉우리’를 세계에서 처음 오르다
  • 경남일보
  • 승인 2020.03.02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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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출리 북봉 정상에 선 이재홍 대원(왼쪽)
1985년 울산의 산 사나이들이 ‘송곳처럼 날카로운 빙설의 봉우리’라는 뜻을 가진 네팔 히말출리 북봉을 세계 초등하는 금자탑을 쌓았다. 경남산악연맹 울산지부는 1985년 10월 27일 네팔 히말출리 북봉(7371m)을 최초로 올라 세계 산악계를 놀라게 했다. 이 기록은 한국 등반 사상 세 번째로 초등하는 영광이었다.

지도 한 장 달랑 들고…히말라야로

히말라야 여명기를 연 주인공은 경남산악연맹 울산지부 현대중공업 합동원정대였다. 원정대는 김억석 단장을 중심으로 원정대장 이규진, 등반대장 박경서, 신영철, 이재홍, 김성출, 남봉희, 이용순 등 경남연맹 울산지부와 현대중공업 합동 원정대원 8명으로 구성했다. 1985년 10월 1일 원정대는 히말출리에 도착했다. 대원들은 대부분 첫 해외 원정이었다. 그러나 7000m급 첫 도전에서 최초로 등정 발자국을 남기기 위해 도전 정신과 열정은 충만했다. 처음 보는 리단다 빙하를 걸을 때는 구름 위의 걷는 기분이었다. 박경서 등반대장의 소감이다.

“히말출리를 왼쪽으로 돌아 베이스캠프로 올라갔다. 오른쪽의 거대한 암벽으로 이루어진 능선을 따라 리단다 빙하를 걸었다. 처음 보고, 직접 걷는 빙하는 신기했고, 처음에는 돌무덤으로 착각했다. 수많은 돌 밑에는 거대한 빙하가 존재하고 있었다. 너무 신기했다.”

10월 2일 원정대는 아주 특별한 곳에 베이스캠프(4000m)를 설치했다. 베이스캠프 주변은 파란 잔디로 뒤덮여 최고의 풍경을 자랑했다. 전망이 좋은 베이스캠프는 정상을 제외하고 등반 루트가 있는 동벽 전 구간을 망원경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위험한 등반에서 대원들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조건이었다. 이튿날 개천절을 맞아 대원들은 간단하게 개천절 행사를 가졌다. 대원들은 모두 기도했다. “우리 원정대의 역사도 단군이 나라를 세운 창조의 역사와 같이 히말출리 역사를 창조하는 날이 되기를….”

식량 부족으로 등반 차질

다음날 등반을 시작한 원정대는 루트 건설에 나섰다. 4㎞가 넘는 리단다 빙하를 지나 전진을 계속한 그들은 오후 5시께 해발 4400m에 1캠프를 세웠다. 2캠프까지 설치하며 순조롭던 등반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6일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해 7일간이나 이어졌다. 등반은 제대로 할 수 없었고, 피해도 속출했다. 눈 무게를 견디지 못한 폴대가 부러졌다. 히말라야 등반에서 가장 중요한 주방 텐트 역시 두 번이나 무너져 다시 세워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식량난까지 겹쳤다. 1주일 넘게 등반을 못하고 베이스캠프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식량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고심 끝에 하루에 두 끼로 줄였지만 셰르파들의 항의가 이어졌다. 결국에는 양을 줄였다. 한 끼 250g으로. 베이스캠프에는 불만이 쌓여갔다. “밥은 먹고 등반해야지요….”

폭설 등 기상악화로 인한 등반이 지연되고 이로 인한 식량 부족은 많은 원정대가 겪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이다. 10월 14일 눈에 묻힌 텐트 4동을 복구하는 한편 1캠프에서 출발한 2명의 대원은 2캠프를 설치하기 위해 급경사로 이루어진 눈 능선 아래 4900m까지 진출했다. 이날 오후 5시 신영철, 김성출 대원과 셰르파가 1캠프에 도착했다. 이튿날 아침 모처럼 화창한 날씨로 등반을 계속했지만 밤새 내린 눈은 어제 터놓은 2캠프로 가는 길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10월 16일 대원들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13일 만에 2캠프를 다시 설치했다. 하지만 2캠프에 있던 텐트 2동이 완전히 망가졌다. 폭설로 벌써 6동의 텐트가 폐기 처분됐다. 피크29와 히말출리 북봉 연결 능선은 하루에 수십 차례 눈사태가 일어나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베이스캠프에 있던 대원들은 ‘쾅’하는 소리만 들어도 반사적으로 텐트 밖으로 나와 눈사태를 바라봤다. 사흘간 폭설이 내려 대원들은 등반을 포기하고 하염없이 내리는 눈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대원들 사이에는 한숨과 한탄만이 흘러나왔다.

 
히말출리 전경
눈 쌓이는 소리가 들린다

대원들의 등반기에는 당시 상황을 말해준다. “사흘간 내린 눈으로 베이스캠프가 30㎝ 정도 높아졌다. 내리는 눈을 거역할 아무런 힘도 없었다. 그저 하늘을 원망하는 것 밖에는…. 이번 원정을 위해 3년간 푼푼이 모은 적금을 깨고, 그것도 부족해 은행 신세까지 지고 온 우리 원정이 한낮 추억거리만 남기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보이고 들리는 것은 눈과 눈 쌓이는 소리뿐이었다.”

1캠프에 있던 대원들은 쌀이 떨어졌고, 2캠프에서는 연료가 없다는 무전 연락이 왔지만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뚫고 갈 수가 없었다. 무심한 하늘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10월 20일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바라본 대원들은 그동안 빼앗긴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10월 21일 2캠프에서 3캠프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하는 설벽 아래 5700m에 고정 로프를 설치했다. 대원들의 사기를 높인 것은 날씨뿐만 아니라 65세의 김억수 단장이었다. 노장으로 대접받던 김 단장이 10㎏의 짐을 지고 젊은 대원들과 함께 2캠프로 가겠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대원들은 말렸지만 김 단장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젊은 대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한 그의 희생정신은 지금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대원들은 입을 모았다. “그 당시 60대 중반의 단장이 1주일 넘게 계속된 폭설로 체력이 떨어지고,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대원들과 같이 짐을 지고 등반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의 헌신은 대원들을 자극했고 기상악화로 상당히 늦어진 등반을 성공적으로 이끈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0월 23일 3캠프로 올라갈 식량과 장비를 옮기기 위해 강풍을 뚫고 전진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대원들이 캠프 설치 후 배낭을 정리하다 라면과 버너, 코펠 등이 강풍에 날아가 잃어버리고 말았다. 식량과 연료, 장비 부족으로 힘든 상황에서 큰 실수였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베이스캠프에서는 잃어버린 식량과 장비보다는 대원들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강풍에 텐트에 날려가지 않도록 로프를 잘라 스노바(snow bar 눈에 꽂아 추락을 예방하는 장비)로 텐트를 단단하게 고정했다.

텐트 대신 ‘설동’으로 견뎌

다음날 3캠프에 있던 대원들과 셰르파는 루트 작업에 나섰지만 강풍과 추위로 6600m까지 진출한 후 철수했다. 히말출리 북벽은 심한 경사와 크레바스, 그리고 설벽 상단에서 떨어지는 빙탑으로 인해 고도를 쉽사리 올릴 수 없었다. 10월 25일 오전 7시 남봉희, 이재홍, 앙파상, 파상 다와가 루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정오부터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지만 작업은 계속됐다. 7000m에서 시작된 설벽은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간 골짜기 형태로 길이는 800m에 달하고 경사는 50도~70도 정도였다. 상단부에서 빙벽과 빙탑이 무너지면서 대원들을 위협했고, 만약 눈사태가 발생한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힘든 구간이었다. 어렵게 설벽 하단을 돌파한 대원들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폭설로 텐트를 사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텐트 대신 설동을 파기로 했다.
이규진 원정대장은 10월 26일 남봉희와 이재홍 대원은 6700m~7000m 부근에서 설동을 파고 하룻밤을 보낸 후 27일 오전 6시 셰르파 4명과 2개조(대원 1명, 셰르파 2명)를 편성해 정상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시간이 없었다. 대원들은 원정을 오면서 휴가를 11월 10일까지 받은 상황이었다. 등반을 마치고 철수 준비에 2일, 하산하는데 9~10일이 걸리고 카트만두에서 행정절차 등을 고려할 때 시간이 촉박했다.

원정대는 위험 부담이 큰 정상 공격팀을 셰르파 2명에, 대원 1명으로 구성해 단 한 번의 정상 등정으로 모든 것을 끝낸다는 작전이었다. 고정 로프는 6400m까지 설치했고, 나머지 구간은 40m 자일 2동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마지막 한 번의 기회를 잡기 위해 10월 26일 정상 공격을 시작했다.

이재홍 대원은 10월 26일 오전 6시 45분 예정보다 늦은 시간에 남봉희 대원과 함께 3캠프를 나섰다. 6400m 고정 로프가 끝나는 지점에서부터 65~70도 경사진 위험한 설벽을 올랐다. 바람은 점점 강해져 얼마 동안 꼼짝 못할 때가 많았다. 오후 1시께 6800m 지점에 도착해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았지만 남봉희 대원은 컨디션이 좋지 않아 셰르파 2명과 함께 3캠프로 복귀했다. 이재홍 대원은 베이스캠프에 상황을 보고하고 오후 5시 30분 저녁을 준비했다.

 
현대중공업 사보에 실린 원정 이야기
이재홍 세계 초등
“행복감이 머리에서 아이젠 아래까지 가득”


D-day인 10월 27일 오전 4시부터 베이스캠프는 들떠 있었다. 그러나 이재홍 대원과 무전 교신이 되지 않자 불안하기 시작했다. 2캠프에 있던 4명의 셰르파가 출발한다는 연락이 왔지만 남봉희 대원은 지쳐 등반할 수 없었다. 긴장감은 오전 7시 이재홍 대원의 무전으로 모든 것이 사라졌다. 모든 준비를 마친 그는 등반에 나섰다. 베이스캠프에서는 7000m를 돌파하는 이재홍 대원과, 2캠프로 하산하고 있는 남봉희 대원을 확인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그렇지만 쉬지 않고 오르고 있는 이재홍 대원을 망원경으로 볼 수 있었다. 그가 길을 내고, 셰르파들이 한참 뒤에 따르고 있었다. 혼자 히말출리 북봉 등정에 나선 이재홍은 멀고도 험한 길을 오르고 있었다. 그는 북봉으로 가기 위해 설원으로 내려섰다. 스노바 2개를 깊숙이 꽂고 자일로 연결해 하강했다. 오후 1시 북봉으로 가는 능선에 도착했다. 정상이 눈앞에 있었다. 그가 움직이는 만큼 정상은 가까워졌다. 심장이 뛰고 호흡은 빨라졌지만 마지막 힘을 내기 시작했다. 등반을 시작한 지 8시간 만인 오후 3시 그는 드디어 정상에 섰다. 이재홍은 회상했다. “큰 눈덩이 위에 더 오를 수 없는 곳에 내가 서 있었다. 행복감이 머리에서부터 아이젠(등산화 바닥에 미끄러짐을 방지하는 장비) 아래까지 꽉 찬 기분이다. ‘왜 산에 가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이 기분을 꼭 전해주고 싶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고.”

그는 베이스캠프에 정상 등정 소식을 알렸다. 그는 동서남북, 360도 방향으로 돌면서 정상에서 사진을 촬영했다. 한참이 지난 후 셰르파들이 도착했다. 모두가 복사열에 피부가 벗겨지고, 입술이 부르터 엉망이었지만 하얀 이를 드러내며 그동안의 힘든 과정과 등정의 기쁨을 함께 누렸다. 그들은 세상을 다 가진 행복감에 젖어 들었다. 그들은 태극기와 네팔기를 꺼내 피켈에 달고 촬영했다. 기쁨도 잠시 그들에게는 어려운 하산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40m 자일을 연결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천천히 내려왔다. 그날 밤 8시 3캠프에 무사히 도착했다. 10월 28일 등정자들과 2캠프에 머물던 박경서, 이용순 대원이 긴 여정의 전쟁터를 뒤로하고 베이스캠프로 무사히 돌아왔다. 김억순 단장과 대장, 그리고 대원들은 한국 등반 사상 세 번째로 히말라야 초등이라는 영광을 안고 귀국했다.

박경서 등반대장은 이렇게 회상했다. “여행 자유화가 되지 않았던 당시 히말라야로 가기가 매우 힘들었다. 히말라야를 직접 보고 몸으로 느꼈지만 희열을 느낄 수가 없었다. 첫 등반이었고 자료가 너무나 없었기 때문이다. 장비도 변변치 않았다. 그저 열정과 패기로 버티고 올랐다.”

그는 카라반 당시 에피소드도 밝혔다. “카라반이 길어서 어려웠다.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베이스캠프로 가는 길에 잘못 들어가 3일간 길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8000m 자이언트 봉우리가 아닌 산에 정확한 정보도 없이 진출해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원정을 떠날 당시 20대 중반 나이였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일부 대원들만 연락해서 만나고 있고, 연락이 되지 않은 대원들도 있다.”고 말했다.

박명환 경남산악연맹 부회장·경남과학교육원 홍보팀장
사진제공=1985 현대중공업 합동원정대

 
박명환 경남산악연맹 부회장, 경남과학교육원 홍보팀장
히말출리 원정사
히말출리 원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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