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11) ‘죽음의 벽’ 가우리상카 동계 세계 초등
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11) ‘죽음의 벽’ 가우리상카 동계 세계 초등
  • 경남일보
  • 승인 2020.03.08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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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꾼들에 첫 정복 허락한 겨울 가우리상카
앞에 있는 5300m 고개를 넘어야 뒤쪽 가우리상카를 등반할 수 있다
“지리산 기슭의 순박한 산꾼들이 세계 유명 산악인들이 모조리 패퇴한 가우리상카(7134m)에 세계 최초로 겨울 시즌에 정상에 올랐다.”

‘히말라야의 아이거’로 악명 높은 가우리상카를 진주 마차푸차레산악회 최한조 대원이 1986년 1월 16일 오전 8시 30분 등정했다. 혹독한 겨울 폭풍설을 뚫고 수백 m에 달하는 직벽에 매달리며 고난을 극복하고 이루어낸 값진 성과였다. 실제로 가우리상카는 세계 유명 등반대가 19차례나 도전했지만 미국팀이 봄 시즌에 두 번 성공했을 뿐이다. 당시 수준 높은 실력을 뽐내던 일본 역시 6번이나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한 7000m급 산에서는 가장 오르기 힘든 산 가운데 하나였다. 이 등반은 한국 등반사에 획기적인 등반으로 산악계에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다.



지리산 산꾼들, ‘히말라야 아이거’ 도전

진주마차푸차레 산악회는 1985년 네팔 로왈링 히말라야에 위치한 가우리상카 원정을 준비했다. 서정배 대장을 비롯해 이석우 부대장·성락건·최한조·이희봉 등 5명이 참여했다. 최한조 대원은 회상했다. “1983년 소백산맥을 종주했다. 한국산악회가 창립 40주년을 맞아 남극과 히말라야 등반을 준비했다. 처음에는 남극에 가고 싶었는데 잘 안됐다. 7000m급 산을 가자는 의견이 있었다. 자료를 받고 원정을 준비했다.”

원정을 1개월 앞둔 1985년 가을 마차푸차레산악회 회원들은 지리산 천왕봉을 찾았다. 무사 등정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당시 진주지역 산악인들에게 지리산은 어머니의 산이자 신(神)이었다. 그들은 ‘지리산이 있어 히말라야가 있다’고 믿을 정도였다. 지리산을 끊임없이 오르면서 하얀 설산인 히말라야로 가는 꿈을 키워왔기 때문이다.

축문을 낭독했다. “지리산 신령님! 산악회 마차푸차레가 히말라야의 난봉 가우리상카로 원정 등반을 떠납니다. 크고 넓으신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 안아주실 때만이 높고 험한 가우리상카 정상에 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식량·장비 지각…카트만두에서 한달 허비

원정대는 10월 31일 네팔 카트만두에 도착, 여장을 풀었다. 하지만 그들은 도착 후부터 어려움에 직면하고 말았다. 배편으로 보낸 식량과 장비 등 화물이 오지 않아 카트만두에서 37일간을 보내야 했다. 등반을 시작하기도 전에 맥이 풀리고 말았다. 당시 부대장의 실수로 이 같은 일이 벌어졌다. 원정대는 결국 부대장을 원정에서 제외하고 서울로 돌려보냈다. 12월 1일 화물이 도착하자 대원들은 식량과 장비 등을 재포장하고 12월 6일 전세버스로 카트만두를 떠났다. 대원들은 “이제야 히말라야로 떠나는구나”라고 실감했다.

최한조 대원은 상황을 설명했다. 셰르파 사다는 원정대원들에게 물었다. “네팔에는 수많은 산이 있다. 왜 하필 가우리상카를 선택했냐? 베이스캠프로 가는 길도 너무 어렵다. 엄청나게 높은 고개를 2개나 넘어야 하고, 전진캠프도 2개나 설치해야 한다.”

대원들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다의 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몸으로 겪어야 했다. 대원들을 태운 버스는 8시간을 달려 12월 6일 오후 7시 해발 2000m의 차리코트에 멈춰 섰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카라반을 시작해야 했다. 다음날 맑은 날씨가 대원들을 흥분시켰다. 그들의 눈앞에는 로왈링 히말라야의 연봉들이 성채처럼 빛나고 있었다. 맨롱체(7181m), 밤몽고(6400m), 캉나추고(6735m), 초부제(6685m), 얄룽리(5630m) 등 웅대한 고봉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서정배 대장 “대원과 셰르파는 하나”

12월 7일 대원 4명·셰르파 4명·정부 연락관·요리사·요리보조·편지 전달자·포터 75명 등 모두 88명이 카라반을 시작했다. 좁고 깊은 협곡을 따라 연결된 출렁다리를 지나고, 천길 벼랑 끝을 아찔하게 돌아갔다. 대원들은 4800m, 5400m의 높은 고개를 넘어 다시 5000m에 도착했다. 대원들은 어렵게 고개를 넘어 다시 빙하로 접어들어 12월 15일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다. 1984년 미국원정대 와이먼 칼브러스가 세웠던 베이스캠프보다 300m 높은 곳에 세웠다. 한국에서 이른 가을에 떠난 원정이 BC에는 2개월이 지난 한겨울에 도착했다. 대원들은 일정이 늦은 만큼 등반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본격 등반을 앞두고 서정배 대장은 등반을 앞두고 특별한 명령을 내렸다. “한 텐트에 셰르파와 대원이 같이 자고, 식사도 같은 자리에서 똑같이 할 수 있도록 해라. 셰르파는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라 친구로 사귀도록….”

서정배 대장의 지시는 많은 의미가 있었다. 특히 히말라야에서 셰르파와 등반대원의 수직적인 관계를 생각하면 파격적이었다. 1920년대부터 히말라야 등반을 시작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 어떤 국가도 셰르파를 이렇게 파격적으로 대우한 전례가 없었다. 대원과 셰르파가 한 텐트에 자는 경우는 전무하다. 기상악화로 어쩔 수 없이 비박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당시 원정에 참여한 최한조씨는 “대장의 명령에 대원들은 물론 셰르파들도 상당히 놀랐다. 어쨌든 그 결정은 셰르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끈 하나의 계기가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베이스캠프로 향하고 있는 대원들
캠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대원들
“왜 하필 이 산을 택했나…” 실감

12월 하순으로 접어들자 원정대는 체링마 빙하에 전진 캠프를 설치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대원들과 포터들은 5400m의 암·빙벽을 통과하기 위해 250m 고정 로프 9동을 깔았다. 이어 5100m 지점에 8명이 한 달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옮겼다. 한 번 올라가면 다시 내려올 시간이 없어 충분한 식량을 미리 날랐다. 8월 21일 5400m 고개를 넘어 체링마 빙하 5200m 지점에 3동의 텐트를 설치했다. 대원들은 5200m 지대를 오르내리며 고소적응을 하며 체력을 충전했다.

12월 22일 최한조 대원과 앙카미, 장부, 라트나, 펨바 셰르파가 전진 캠프로 떠났다. 다음날 성락건 대원은 베이스캠프를 출발했지만, 이희봉 대원은 컨디션이 좋지 않아 남았다. 12월 23일 눈이 내리고 천둥이 쳤지만 성락건 대원은 전진 캠프로 나아갔다. 그는 체링마 빙하에서 루트를 살폈다. 5000m의 빙하에서 곧장 솟은 등반 루트는 눈이 달라붙지 않을 정도로 급사면이었다. 성락건 대원은 “체링마 빙하에서 올려다본 등반 전 루트 난이도가 4~6급이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너무나 놀란 가슴으로 그 벽을 보고 한참 동안 넋을 잃었다”고 말했다.

크리스마스날 셰르파들은 1캠프를 설치하기 위해 떠났고, 성락건 대원은 고소적응과 루트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5700m 봉우리로 떠났다. 성락건 대원은 서릉 5300m 부근에서 루트를 관찰한 결과 날씨가 좋으면 성공은 시간 문제라는 생각을 가졌다.



최악의 날…1캠프에 폭풍 강타

그러나 12월 26일 아침부터 1캠프(5700m)에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으며 오전 9시부터 폭설로 변했다. 오후부터 바람까지 불기 시작해 폭풍설로 변했고 대원들은 좁은 텐트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조그만 틈으로 사정없이 들어오는 바람과 눈은 막을 수가 없었다. 강력한 바람에 텐트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했다. 망망대해(茫茫大海)에서 높은 파도를 만난 작은 돛단배처럼….

12월 27일 최악의 날이 찾아왔다. 폭설은 강한 바람을 등에 업고 텐트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텐트는 언제 무너질지 모를 정도로 흔들렸다. 대원들과 셰르파들은 텐트가 무너지지 않도록 손과 몸으로 지탱하며 바람과 맞섰다. 2인용 텐트에 있던 최한조 대원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식당 텐트로 피신했다. 밤이 되면서 바람은 미친 듯이 불어닥쳤다. 텐트에는 20㎝ 이상 눈이 쌓여갔다. 그들은 텐트 벽에 등을 기대고, 손으로는 폴대를 잡아 텐트가 쓰러지지 않도록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인공호흡으로 셰르파 목숨 건져

다음날 오전 6시가 되자 폭풍설이 점차 약해졌다. 아침 햇살과 완전히 날이 밝았다. 성락건 대원은 눈 속에 파묻힌 텐트를 정리하고 들어갔다. 셰르파 2명은 눈에 눌려 산소 결핍으로 의식이 흐릿한 상태였다. 급하게 약을 먹이고 인공호흡을 실시한 후 그들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텐트는 모두 망가져 이런 상황에서는 등반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8월 28일 낮 12시 이희봉 대원과 셰르파 등 6명을 베이스캠프로 돌려보내고 최한조, 성락건 대원, 라트나 셰르파 3명은 남아 캠프를 보수하기로 했다. 1986년 새해가 밝았다. 1월 1일 오후 4시 텐트 수리를 마치고 보조캠프를 세우는 동안 식량을 갖고 셰르파 3명이 올라왔다. 앙카미 셰르파는 서정배 대장의 편지를 건넸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최한조 대원을 공격대원으로 하고, 식량과 가스가 부족하니 상황에 맞게 현명한 판단을 내려 달라. 셰르파들이 새 텐트로 교환해 주지 않으면 생명에 위협을 느껴 등반할 수 없다고 한다. 예비 텐트가 없는 우리 원정대는 어려운 고비를 맞고 있다. 결국 이에 상응하는 보너스를 주기로 하고 텐트를 고쳐서 가져가느라 날씨가 좋은 귀중한 시일을 허비한 셈이다.”

 
서정배 대장(왼쪽)과 세르파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최한조 대원 정상으로…

1986년 새해가 밝았다. 대장의 결정에 따라 성락건 대원은 베이스캠프로, 최한조 대원은 정상 등정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최한조 대원은 이틀간 휴식을 취하고 1월 3일 등반을 시작했다. 남은 대원과 셰르파들은 며칠간 매달려 6300m 깎아지른 빙벽 위에 텐트 1동을 설치하며 2캠프 건설에 어렵게 성공했다. 2000m가 넘는 구간이 암벽과 빙벽으로 경사가 심해 용변을 볼 때도 안전하게 확보해야 하는 등 견디기 힘든 고통이 이어졌다. 2캠프에서 6800m 3캠프를 만드는데 다시 3일이 걸렸다.

최한조 대원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최소한의 침구류와 등산 장비만을 챙겼다. 셰르파들은 고정 로프를 설치하고 텐트를 설치했다. 텐트에서는 내가 셰르파들에게 따뜻한 차와 음식을 만들어 함께 먹었다. 셰르파들은 나의 이런 행동에 감명을 받았고 우리는 서로 믿고 우정이 싹트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성공의 디딤돌이었다.”

1월 12일 3캠프에서 정상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구름이 몰려오고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등반에 나섰지만 바람에 몸이 밀려 바위에 부닥쳐 사고가 날 수 있어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식량이 하루 치밖에 없어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그들은 최소한의 식량으로 버티며 날씨가 호전되기를 바랐다.

 
등정에 성공한 최한조(왼쪽 두번째)가 등정 후 베이스캠프에서 격려를 받고 있다.
가우리상카를 겨울철 세계 초등한 최한조 대원. 그는 현재 산청군 금서면에서 필봉산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정상에서 배가 고팠다”

1월 16일 새벽 1시 바람이 조금 약해지자 최한조 대원과 앙카미, 장부 셰르파 3명이 마지막 캠프를 떠났다. 최한조 대원과 앙카미는 6시간 사투 끝에 오후 2시 30분 정상에 섰다.

최한조 대원은 34년이 흐른 지금도 그날을 뚜렷하게 기억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힘은 들었지만 특별한 기쁨도 없었다. 잠시 후 배가 굉장히 고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가 고파 제대로 하산할 수 있을까 싶었다. 2캠프에 도착해서 남은 음식을 코펠에 모아 죽을 끓여 먹었다. 내려오면서 장비를 갖고 내려오는 바람에 배낭 무게가 40㎏은 넘었을 것이다.”

그들은 30분간 정상에 머물며 사진을 찍고, 태극기와 한국산악회기, 마차푸차레기를 눈속에 묻었다. 최한조는 2캠프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18일 오후 6시 베이스캠프에 무사히 도착했다.

성락건 대원은 기쁨을 다음과 갚이 표현했다. “베이스캠프에서 전 대원은 하나가 되어 눈물을 흘렸다. 최한조 대원 얼굴은 반쪽이 되어 얼마나 힘든 등반을 했는가를 잘 말해주었다. 가우리상카르 동계 초등이라는 영예를 안았지만 참으로 운이 좋았다. 우리가 원정을 떠난 후 마차푸차레 회원들이 매달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마고할미에게 제를 지내며 무사 등정을 기원한 덕분이 크다.”

/박명환 경남산악연맹 부회장·경남과학교육원 홍보팀장

 
 
 
가우리상카

네팔 중동부 롤왈링히말라야(Rolwaling Himalaya)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으로 힌두교에서 파괴와 재생의 신 ‘시바’의 다른 이름인 ‘가우리’와 그의 아내인 ‘상카’가 합쳐져 붙여진 이름이다. 가우리상카는 ‘가우리(남봉·7010m)’와 ‘상카(북봉·7134m)’ 2개 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1950년대부터 등반이 처음 시도됐으며 미국의 존 로스켈리가 1979년 봄시즌에 도르지 셰르파와 함께 3000m 높이의 서벽으로 상카를 초등했다. 그해 가을 시즌에는 영국의 유명 산악인 피터 보드맨 등이 암탑과 빙탑, 눈처마로 이어지는 4㎞의 서릉을 돌파하고 가우리를 초등했다. 한국은 1985년 여름 시즌 우정산악회가 처음으로 남서릉으로 시도했지만 6500m에서 돌아섰으며 그해 겨울 시즌 진주 마차푸차레산악회가 남서릉에 도전해 제 3등, 겨울철 최초 등정 기록을 세웠다. 2008년 겨울 한국산악회팀(대장 강성우)가 서벽으로 정상을 노렸으나 실패했다.



가우리상카등반사(도표)

212서버-편집국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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