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물
나비물
  • 경남일보
  • 승인 2020.03.09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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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란 (수필가)
손정란

 

해가 지면 초승달이 나뭇가지에 내려앉는 매화산 아래 첫 집. 이엉을 언제 이었는지 초가지붕엔 잡초가 무성한데 머리가 희끗희끗한 총각이 혼자 살았다. 얼굴에는 힘든 삶을 버텨온 주름살이 자글자글했고 늘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 다녔다. 겨레붙이 하나 없고 이름도 성도 나이도 깜깜하건만 어른들이 총각낭개라고 부르기에 우리도 그렇게 불렀다.

끼니때가 되면 오가리솥 아궁이 앞에 웅크렸다. 볕살이 포근한 날은 마당가에 덕석을 편 자리만큼 쓸쓸함도 펴 놓고 앉아 때워도 자꾸 새는 양은냄비 솥단지를 손질하고. 아무 때라도 산에 올라 땔나무를 푸지게 묶어와 부엌 모퉁이에 쟁여 두었다. 농사를 짓는다거나 바깥세상에 나가서 돈을 벌지도 않는데 무얼 먹고 살까 참 알쏭했다.

마을 사람들은 가을걷이가 끝나고 꽃등으로 방아를 찧으면 쌀 서너 되, 보리쌀 두어 되, 고구마 한 바가지를 낡고 찌그럭거리는 마루에 놓아두곤 했다. 김치를 담그면 한두 포기, 무도 두세 개. 결혼식이 있거나 회갑 잔치가 있는 집에선 고기며 떡이며 과일을 신문지에 따로따로 싸서 아이들에게 갖다 주라고 일렀다. 그랬구먼.

입춘이 지나고 이 산 저 산 꽃 피는 봄이 오면 총각은 테두리가 떨어져나간 대소쿠리와 손칼을 챙겨 고사리도 꺾고 쑥이랑 냉이 달래 씀바귀를 캐러 다녔다. 여름까지 물물이 돋아나는 온갖 나물을 사부작사부작 캐어 삶거나 쪄서 말렸다. 자루에 담에 차곡차곡 시렁 위에 얹어두었던 묵은 나물은 이듬해 정월 대보름이 지날 무렵이면 없어졌다.

흙담 옆 턱이 허물어진 우물 속으로 팽팽하게 두레박을 내리다 거기, 하늘이 내려와 퍼지는 동심원에 젊은 날의 꿈을 비춰보려나. 하루에 한 뼘씩 늙어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총각은 오래오래 우물을 들여다본다. 돌 틈에 뿌리내린 물이끼가 짙푸르다.

아마도 이십 년쯤 지났을 기라. 자운영 꽃이 흐드러지던 어느 날 달랑 보퉁이 하나를 든 여인이 치맛자락을 팔랑거리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짙은 분 냄새가 났것다. 마침 나물거리를 헹구느라 물을 퍼 올리던 총각이 그만 두레박줄을 놓쳤다지. 비알 밭을 매고 내려오던 아낙네 두엇이 흙담 위로 기웃거리고.

참속을 알 수 없는 여인은 보퉁이를 던지듯 내려놓고 마루에 걸터앉더니만 다짜고짜로 저도 오갈 데 없으니 같이 살자고 했다던가. 어처구니없어 사느랗게 보고만 있던 총각낭개가 간짓대를 찾아 두레박을 건져 올린다. 퍼 올린 한 두레박 물을 들고 여인이 앉아 있는 마루 쪽으로 성큼성큼 가더니 보자기를 펼치듯 쫙 끼얹었다.
 
손정란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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