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502)
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502)
  • 경남일보
  • 승인 2020.03.12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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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창선도 출신 김봉군과 양왕용 교수의 문단 이력 읽기(11)
당시 시전문지 ‘시문학’이 67년에 중단된 전문지였지만 양왕용 교수는 명실상부하게 김춘수 시인의 이름으로 추천된 첫 제자였다. 물론 양 교수의 후배들은 70년대초부터 ‘현대문학’과 ‘형대시학’ 추천위원으로 있었던 김춘수 시인을 통해 많이 데뷔하였다. 덧붙일 것은 김춘수 시인의 고향이 통영이고 양 교수의 고향이 창선도이므로 남해바다라는 공간을 공유하는 사제지간이 된 것이었다. 신비한 것은 호적상의 생일이 11월 25일생으로 같았다는 점이다. 김춘수 시인이 1922년 11월 25일생이고 양 교수는 21년 뒤인 1943년 11월 25일이었던 것이다.

양 교수가 부산으로 내려온 시기는 경북대학교 대학원에서 김춘수 시인을 지도교수로 모시고 석사학위를 받은 후인 1969년 3월이었다. 지금은 평준화되어 있지만 그 당시는 부산의 명문 중학인 경남중학교 강사를 그해 11월 말까지 하다가 정식 교사 발령을 받은 곳은 지금은 부산시민공원 앞에 있지만 그 당시는 하얄리아부대라는 미군부대 앞의 부산진중학교. 국어교사를 1973년 2월 말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시인으로 작품도 쓰고 한편으로는 대학교수가 되기 위하여 1년에 한 편씩 논문도 썼다.

1973년 3월부터는 그 당시에는 서대신동에 있던 부산여자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전보발령을 받아 1976년 5월 1일에는 하단으로 이사온 부산여고에 1년 가까이 근무하기도 했다. 당시 하단에는 집들이 거의 없고 에덴공원이 있고 젊은이들이 가는 카페들이 드문 드문 있었다. 1976년 5월부터는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로 옮겨 2009년까지 중등학교 교사들을 양성했다.

양 교수는 결코 다작의 시인이 아니다. 시인이 된지 50여년이 되었는데 7권의 시집과 1권의 시선집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에 연구논문과 평들을 많이 썼다. 양 교수는 대략 7, 8년 주기로 시집을 내었는데 그때마다 시작 경향이 조금씩 바뀌었다. 1975년에 낸 제일시집 ‘갈라지는 바다’는 주로 20대와 30대 초반의 내면세계를 분석한 시집으로 젊은 날의 고뇌가 형상화 되어 있다. 1981년 서울의 문장사에서 출판한 제2시집 ‘달빛으로 일어서는 강물’에서는 문명에 대해서는 비판적이고 원시성을 동경하는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았다.

물론 첫 시집에서도 그런 경향이 부분적으로 보였지만 이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그가 부산대학교로 직장을 옮기기 전의 직장인 부산여자고등학교가 1975년 5월 서대신동에서 하단동으로 옮긴 후 한참 개발붐이 인 하단과 낙동강 하구의 생태계가 파괴되어가는 현장을 보면서 쓴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때부터 연작시를 주로 창작하게 되었다. ‘하단 사람들’ 13편과 ‘도회의 아이들’ 10편, ‘남해도’ 10편 등이 그것들이다.

순수와 원시에의 동경은 양 교수를 결국 유년시절의 단편적인 기억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유신철폐 시위가 벌어지고 1979년의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 80년대의 신군부 세력의 등장, 광주사태 등 역사의 격동기에 그 현장이던 대학 특히 부마사태의 주역이던 부산대학교에 근무하면서 겪은 상황의식은 오히려 양 교수를 순수 절대시로 돌아가게 했다. 문장의 종결어미를 명사형으로 끝내는 실험의식에서 시대상황의 절박함이 무의식적으로 표출되었다. 이 시기의 시는 제3시집 ‘섬 가운데 바다’에 수록되었다. 이 시기가 양 교수의 시단활동이나 학문의 길에서 가장 왕성히 끌고 간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1980년에는 부산의 중진시인들로 구성된 절대시 동인에 참여하였고 1982년에는 그동안 썼던 논문들을 모아 ‘한국 근대시 연구’라는 연구서를 내었다. 그리고 1983년부터 1986년에는 모교인 경북대학교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수료하고 1988년 ‘정지용시연구’로 박사헉위를 받았으며 마침 정지용(1902- 1950) 시인이 납북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해금되어 단행본 ‘정지용시연구’를 그해 5월 서울 삼지원에서 내기도 했다. 양교수의 정지용에 대한 관심은 1972년 학술지 ‘어문학’에 발표한 ‘1930년대 시 연구, 정지용의 경우’라는 논문에서 비롯되었다. 그 당시는 해금되지도 않았고 이름조차 ‘정○용’으로 가운데 자를 공개하지 않던 시절이다. 이로 인해 좌파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박사학위 논문도 학계에서는 정지용 단일연구로는 처음이라 오래 전에는 심포지움 주제 발표자로 옥천군에 블리어 간 적도 있고 최근에는 일본 동지사대학교 한국문인협회 심포지움에서도 주제 발표를 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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