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12) 울산, 7000m급 2개봉 동시에 오르다
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12) 울산, 7000m급 2개봉 동시에 오르다
  • 경남일보
  • 승인 2020.03.15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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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990m 오르고 올라…정상에서 주고받은 환호성
1988년 네팔 다울라기리6봉·구르자히말 원정대
6000m급 구스퉁 북봉까지 3개 봉우리 모두 정복

 
다울라기리6봉 정상에 선 남봉희 등반대장


“우리는 모두 2만990m(3개 봉 정상을 합한 높이)를 오르고 나서야 확실하게 웃었다. 영국을 비롯한 산악 선진국에서 일찍부터 시작했던 이른바 멀티 피크 익스페디션(Multi peak expedition)을 깨끗하게 성공했기 때문이다.”-원정대 일동.

경남산악연맹 울산지부 산악인들이 1988년 다울라기리6봉(7268m)과 구르자히말(7193m), 구스퉁 북봉(6529m) 3개 봉을 동시에 등정했다. 울산 산악인들은 1985년 경남에서 이뤄진 첫 해외원정에서 히말출리 북봉(7371m)을 겨울철 세계 초등한 후 3년 만에 3개 봉 등정 기록을 세웠다.

신선한 도전…7000m 독립 2개봉

1980년대 국내 산악계는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한 8000m 자이언트급 등반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86년 세계 2위봉 K2(8611m) 등반에서 김창선, 장봉완 대원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정상을 밟은 것이다. 이듬해 12월 22일 허영호는 국내 최초로 겨울철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그의 기록은 겨울 등반 강국 폴란드와 일본에 이어 세계 3번째로 달성한 대기록이었다. 서울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 대한산악연맹은 에베레스트와 세계 4위 봉우리 로체를 동시 등정하는 성과를 올렸다. 에베레스트~로체 연속 등반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달성한 기록이었다.

하지만 7000m급 독립된 2개 산을 오르는 시도 자체가 한국 산악계에서는 신선한 도전이었다. 서울올림픽이 중간을 넘어서고 있던 1988년 9월 26일 네팔 히말라야 다울라기리 산군. 추석 다음 날이라 둥근 달이 환하게 다울라기리6봉과 구르자히말을 비추고 있었다. 신영철 대장은 새벽 3시 카페 빙하 위에 설치된 베이스캠프에서 빙하 얼음을 녹인 물로 세수를 하고, 라마 제단에 불을 피웠다. 대원들은 다울라기리6봉과 구르자히말을 하루에 동시 등정하기 위해 4캠프(6750m)에 머물고 있었다.

남봉희 등반대장…다울라기리6봉 등정

신영철 대장은 지난 2년간 시간과 노력, 열정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우리는 원정 계획을 세우고 2년 동안 산에 대한 루트를 공부하고 전국을 돌며 훈련했다. 라마 제단에 절을 하며 대원들의 무사 등반을 기원했다. 물론 정상에 대한 욕심도 많았다. 정말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고 회상했다.

신 대장은 무전기로 대원들을 깨웠다. 대원들은 스프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새벽 5시 52분 4캠프를 출발했다. 다울라기리6봉은 남봉희 등반대장과 네팔 앙파상 대원이, 구르자히말은 이상호·이승환 대원과 네팔 펨바 대원이 선발됐다. 원정대는 네팔 셰르파 3명을 정식 대원으로 참가시키고 있었다. 등반 2시간이 지나자 구르자히말 쪽에서 연락이 왔다. 구르자히말 남서릉 루트는 4캠프에서 300m를 내려가고, 다시 칼날처럼 예리한 능선을 지나 정상으로 가야 하는 위험한 루트였다. 신 대장은 “처음 길을 내는 상황은 쉽지 않았다. 대원들에게 안자일렌 상태를 철저하게 점검하고, 철저하게 행동하라”고 지시했다.

다울라기리6봉도 만만치 않았다. 남봉희 대원은 얼음 조각이 날리는 강풍 때문에 바로 서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눈을 뚫고 전진하다 보니 체력 소모가 많았다. 지난 8일간 대원들은 계속되는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루트를 보수하고, 식량과 장비를 운반하며 많은 힘을 쏟아부었다. 오전 10시 30분 구르자히말 정상을 향하던 이상호 대원은 강한 바람에 전진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으며, 바람 소리는 무전기를 통해 베이스캠프에 그대로 전달됐다.

베이스캠프는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졌다. 두 개의 정상으로 향하는 대원들이 있어 긴장감도 두 배였다. 12시 30분 다울라기리6봉에서 무전 연락이 왔다. “여기는 정상!” 베이스캠프에서는 비디오를 활용해 동서남북으로 가능하면 많은 촬영을 하라고 지시했다.

남봉희 등반대장은 등정의 기쁨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인간이란 존재는 자연 앞에 참으로 미약하다. 하지만 굽히지 않는 뜨거운 열정이 있었다. 다울라기리6봉 7268m 정상은 서너 평 남짓한 평평한 설원이었다. 이 곳에 서기 위해 지난 2년 동안 그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가, 하지만 이곳에 서기 위한 그 과정이 가장 소중했다는 것을 느꼈다.”

 
구르자히말 정상에 선 이상호 대원
이상호 대원…구르자히말 등정

한숨을 돌린 베이스캠프의 모든 눈과 귀는 구르자히말로 향했다. 13분 후 구르자히말 정상에서 무전이 날아들었다. 순간 캠프에서는 대원들이 캠프 주위를 뛰어다니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의 눈에는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후 1시 정상에 선 대원들은 무전으로 서로 축하의 말을 전했다.

이상호 대원은 “정상에서 대장과 교신할 때 목이 매여 말이 잘 이어지지 않았다. 다울라기리6봉 대원들과 무전 연락할 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희열을 느꼈다. 기쁨도 잠시였고 내려가는 길은 온몸에 힘이 갑자기 빠져 너무 힘들었다. 쉬는 횟수가 늘어나고 자일이 그렇게 무거운 것인지 그때 알았다. 4캠프에 도착해 드디어 해냈다는 뿌듯한 기쁨이 가슴 속 한줄기 뜨거운 눈물이 되어 북받쳐 흘렀다.”

신영철·이상호·이승환…구스퉁 북봉으로

한편 이에 앞서 원정대는 구스퉁 등정을 준비했다. 9월 14일부터 시작된 악천후로 3캠프의 텐트가 모두 눈에 파묻혀 사용 불가능했고 4캠프에 고소텐트 1동을 설치했다. 계속되는 눈보라로 인해 일부 대원이 베이스캠프로 철수했지만 9월 19일 오전 7시 30분 날씨가 좋아지자 2캠프(5750m)에 머물고 있던 신영철 대장, 이상호, 이승환, 송경득 대원이 정상으로 출발했다. 송경득 대원이 컨디션 난조로 등반을 포기하고 하산했지만, 나머지 세 명은 40m 자일에 서로를 확보한 후 구스통 설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숨어 있는 크레바스에 대한 두려움이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전율을 느꼈다. 이제까지 누구도 발을 들여놓지 않은 전인미답의 눈밭을 걷는 것 역시 두려웠다.

이상호 대원과 이승환 대원은 번갈아 눈 속을 헤치고 나가자 날씨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파랗게 입을 벌린 크레바스를 어렵게 피해가며 나아갔다. 2캠프를 떠난 지 7시간 정도 지나자 다시 눈이 내렸다. 거의 정상에 도착했다고 생각했지만 바람까지 불어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공격조는 본능적으로 경사진 곳을 올랐다.

 
다울라기리4봉 구루자히말 등반루트
눈사태를 극복하며 정상에 서다

잠시 후 ‘쿵~ 쩍!’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원들은 반사적으로 눈사태를 직감하고 피켈을 눈 속 깊숙이 꽂았다. 자세를 낮추고 보니 대원들이 서 있는 설사면이 가로로 길게 쪼개지고 있었다. 그들은 안전을 하늘에 맡기고 손과 발을 최대한 휘저으며 위로 올라갔다. 더이상 오를 곳이 없었다. 사방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눈보라가 몰아쳤다. 그들은 30분을 기다렸다. 정상을 확인하지 않고, 사진도 찍지 않고 내려가기에는 너무나 억울했다. 바로 그때 이상호 대원이 기도했다. “제발 10초라도 날씨 좀 좋게 해주이소!” 잠시 후 기적처럼 눈이 그치고 주위가 어렴풋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상에 서 있었고, 만약 조금 더 나아갔다면 눈처마를 통과해 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1988년 9월 19일 오후 4시 10분 그들은 구스퉁 북봉 정상에 섰다. 기념 촬영을 하고 마스코트를 묻고 하산을 시작했다. 어둠이 밀려오는 저녁 전진 캠프에 도착한 대원들의 눈가에는 이유 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1988년 한국다울리기리6봉-구르자히말 원정대는 구스퉁 북봉을 합쳐 총 2만990m를 오르고 확실하게 웃었다.

박명환 경남산악연맹 부회장·경남과학교육원 홍보팀장

 
다울라기리6봉을 등반하다 쉬고 있는 이상호 대원(앞).
팸플릿

이상호 구르자히말 등정기

이상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비몽사몽이었다. 일어나라는 무전기였지만 휴식을 더 취하고 싶을 뿐이었다. 9월 26일 오늘은 정상 공격하는 날이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 첫 생일날이다. 아빠 없는 첫 번째 생일.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다. 정상에 서서 좋은 선물을 선사하리라 다짐하면서 나의 가족 사진을 바라보았다. 새벽 5시 40분 이승환 대원과 텐트를 나섰다. 정상에 가려면 약 200m 가량을 내려가야 했다. 칼날 같은 능선이 길을 막았다. 만약 발을 잘못 디디면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히말라야 경험이 많은 펨바 셰르파가 앞장섰다. 나는 조심하라며 한글(펨바야), 영어(체크: 확인), 네팔(비스타리: 천천히)어로 말했다. 펨바가 나를 보고 웃었다. 그 웃음이 흰산 만큼이나 맑고 깨끗했다.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이제 진정을 좀 찾은 것 같았다. 오랜 시간이 걸린 끝에 무사히 통과하자 정상까지는 쉬웠다. 3명은 교대로 눈을 헤치고 나갔다. 배가 고팠다. C레이션을 먹고 따뜻한 물을 마시니 한결 좋았다. 저 위로 정상이 보였다.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한참을 올라 정상에 섰다. 주위의 파노라마는 장관이었다. 구름이 나보다 까마득히 아래서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다울라기리 1봉을 비롯한 연봉들이 가깝게 보였다. 나는 품속에 간직한 가족사진을 눈 속에 고이 묻었다. 내 가정에 영원한 행복이 깃들기를 기대하면서….”

 
다울라기리등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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