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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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20.03.16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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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란 (수필가)
손정란
손정란

 

봄이 오면 꽃봉오리가 몸살을 되게 앓고 나서 꽃을 활짝 피운다. 햇살이 꼼지락거리고 새순이 배냇짓하는 봄이 와야 하는데 온 나라가 우꾼우꾼한 몸살을 앓고 있는 중이다. 나이 든 사람은 오들오들 떨게 하는 이 몸살이 더 힘겹다. 바쁘게 지내면 짧고, 텔레비전 앞에서 뭉개거나 손전화만 만지작거리면 하루가 길게 느껴진다. 우두커니 앉았느니 푸르른 이내가 깔린 가좌산에 오른다. 세상과 담쌓지 않으려고 바깥에 나가는 것을 딱 세 번으로 정했다. 산에 가거나 달걀과 우유를 사러 할인점에 가거나. 입 가리개를 사려면 내가 태어난 해의 끝자리가 하나이니 월요일 일찌거니 약국에 가야 하는 일이다. 산마루를 넘으면 또 산이어도 길이 있겠거니 여기지 뭐.

아픔이 모이면 꽃이 된다고 했다. 한뉘를 살아가려면 더러 외로움도 견뎌내야 하는 거제. 마음이 헝클어져 있는 날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어떠리. 거기, 명지바람이 조각구름 새털구름 송이구름 안개구름 뭉게구름 솜구름 꽃구름을 무더기무더기 부려놓고 있응께. 정다운 이들과 같이 밥을 먹는다거나 모꼬지에도 나갈 수 없다. 어린이집이랑 학교, 학원, 도서관도 문을 닫았다. 옛 시인은 사람의 정을 가리켜 순간이 만들어내는 꽃이고 세월이 무르익게 하는 열매라고 읊었다는데. 이만큼씩 거리를 두라고 하니까 수필 쓰기 수업도 두어 달 숨고르기로 했다. 입고프고 마음이 시름겨워 모두숨을 쉬어본들 어쩌누. 바지런히 움직거리고 폭 자고 냉장고 안을 뒤적거려 꼬박꼬박 끼니라도 챙겨 먹어야지.

오늘은 봄동 한 움큼에 사과 하나를 나박나박 썰어 넣고 겉절이로 무쳤더니 아삭아삭. 돼지고기를 잘게 썰어 기름에 슬슬 볶다가 당근, 감자, 양파 자잘하게 썰고 다진 마늘 넣어 한소끔 김 올리다 울금 가루를 개어 붓고 걸쭉하게 끓인다. 내일은 달래 전 부치고 달걀찜 몽글몽글 부풀리고. 모레는 묵은지 한 쪼가리 꺼내 참치 한 통 따 넣고 국물 바특하게 잡아 얼큰하게 끓인 찌개를 올린 쥐코밥상이지만 냠냠하다.

맛나게 먹었으니 졸음에 겹다. 햇빛이 치자색으로 물들이고 있는 머리맡에 깔개를 세워 그늘을 깃들게 해놓고 누워서 책을 펴든다. 에그, 겨우 두 장 넘겼는데 깨나른한 잠이 스르르 내려앉는다. 봄날의 낮잠은 번거로운 시름을 다독여 준다기에….

매섭고 독한 몸살이 사그라지면 가물가물 아지랑이 오르고 먼 산의 뻐꾹새 울음소리에 앙증맞은 제비꽃이 기지개 켜는. 분홍빛 봄날이 우리에게 올 것이므로 나는 한겻쯤 낮잠을 잘란다. 올해는 아무래도 봄이 늦게 올랑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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