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는 유채 씨를 뿌린다
농부는 유채 씨를 뿌린다
  • 경남일보
  • 승인 2020.03.24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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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대 (수필가)

 

산그늘 바위틈을 움켜잡고 찬바람 벗 삼아 버티던 서릿발도 남녘 바다로부터 슬그머니 밀려온 봄바람에 에멜무지로 시간만 붙든다고 우주 순행의 섭리를 막을 수 없음을 아는지 노랑나비 날개 짓 몇 번에 흙을 놓아둔 채 슬며시 땅으로 스며든다. 텃밭 양지바른 울타리 근처에는 청백색 장다리꽃이 앙증맞고 봄을 재촉하는 꿀벌소리 요란하다. 비닐 온상 안에서 왕겨두엄을 뒤집어쓰고 온 힘 다해 생명을 키우는 자주색 고구마 순은 송알송알 맺힌 물방울에 닿아가며 소소리바람 부는 밭이랑에 나가고 싶어 안달이다. 마을마다 아이들이 넘쳐나던 때, 후미진 산 비알 밭이건 도랑물 질척이는 다락 논 할 것 없이 흐드러진 봄볕에 밀·보리가 종다리 노래 장단 맞추어 푸른 물결을 만들었다. 논물 잡으러 새벽일 나간 어미 기다려 울어 지친 송아지 목이 메고, 해 길어 심심한 아이는 버들개지 호드기 불며 검불덤불 마른억새 밭둑길을 뛰고 달렸다. 긴 봄날이 아까워 어른들은 김매고 씨 뿌리며 논밭에서 하루를 보냈고, 심심한 개구쟁이들은 새끼 염소며 강아지와 어울려 절로 자랐다. 호미자루 꽂을만한 좁은 터일지라도 깔축없이 완두콩에 푸성귀를 심고 애면글면 바가지 물을 날랐다.

한국전쟁 후 베이비부머 시대, 일꾼 넘치던 시골 마을에는 이젠 농사지을 사람조차 없다. 육순이 젊은이요 팔순 어르신이 트랙터를 몬다. 파란 융단 깔며 밀려드는 봄볕을 주체 못하던 다락 밭 계단 논은 경지정리로 바둑판이 되었지만 잡풀 듬성듬성한 채 유채 씨 품는 것 외 하릴없다. 가격경쟁력도 없고 소비마저 되지 않는 보리나 밀을 심느니 정부에서 주는 직불금을 받고 땅을 버려둔다. 횅하니 바람만 지나는 빈 땅 보는 농사꾼 마음이 어떨까. 꽃피고 나면 그대로 갈아엎어 밑거름 신세에 불과할 유채지만 혹 신작로 따라 오가는 이들 꽃구경이나 하라고 마음 넉넉한 농부들이 마을간 품앗이로 씨를 뿌렸다. 이봄, 외진 산골까지 얼마나 구경꾼이 올지 모르지만 그래도 꽃씨를 뿌리는 마음은 빈집에 사람 든 마냥 푸근하단다.

사람 없는 시골은 이제 봄이 와도 봄을 맞지 않는다. 몰래 스쳐 지나는 고향의 봄은 무너진 담장쯤에서 옛날 밥상에 올랐던 버려진 나물만 키우다 밀려 날듯하다. 삶에 지친 도시사람들이 좁디좁은 공간에서 영생을 빌다가 역병에 집단 감염된다. 얼마 전 어느 시골에서 70대 농부가 경운기 사고로 세상을 떠나셨단다. 봄이 봄 같지 않은 이 봄에 무엇을 원망하고 누구를 탓할 수야 없지만 사방 트인 청정 시골 자연에서 건강을 얻고 구원을 빌며 살 수는 없을까. 사람이 건강해야 봄도 봄이다.

이덕대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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