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이탈리아
[경일춘추]이탈리아
  • 최창민
  • 승인 2020.03.25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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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환/하동주민공정여행놀루와(협)대표
조문환_놀루와 대표

 

나는 이탈리아 북부 피사에서 제노바로 가는 완행기차를 타고 여행 중이다. 기차의 진행방향과는 반대방향으로 앉아 있다. 기차는 느리다. 반대방향으로 앉으면 진행방향으로 앉을 때보다 창밖의 사물들이 느리게 사라진다. 나는 이 기차에 앉아 이탈리아가 우리나라보다 더 많이 가졌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적고 있다.

느린 걸음,더 맑은 하늘, 푸른 잔디, 작은 카페, 그 카페에서 병아리 눈물만큼 작은 에스프레소 한 잔 두고 나누는 웃음과 대화, 약간의 무질서함과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지켜지는 질서,본주르노와 차오! 차오! 하는 인사, 눈치 없는 큰 소리의 전화통화, 당당한 담배연기, 뒷골목에 버려진 쓰레기와 개똥, 창가의 화분, 붉은 지붕과 하얀 벽, 단조로운 해변과 비치파라솔, 그 아래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반라의 사람들, 활엽수 나무와 그 아래의 벤치, 철도역에 버려진 객차, 이제는 다니지 않아 잡초 무성한 레일, 곳곳의 낙서, 타바키아라고 하는 우스운 가게, 부부나 연인끼리 잡는 손, 여자 버스 운전사, 큰 성당,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셀카봉 파는 흑인 총각들, 거리의 악사, 주인 따라 구걸하는 개, 창밖의 빨래, 공원과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 높은 성과 성벽, 폰테라고 하는 오래된 다리, 피자와 발음이 비슷한 피아자, 피체리아,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퍼 붓는 키스, 귀걸이와 피어싱, 문신, 찢어진 청바지, 로또 파는 가게, 어두운 현관과 방, 옛날 할머니들이 치마 속에 차고 다녔던 것과 비슷한 열쇠꾸러미, 시계탑과 그 아래의 작은 광장, 젤라또라는 아이스크림, 스쿠터 소리와 매연, 여행가방과 배낭족, 시내에서 심심찮게 만나는 기차 승무원, 나이 많은 올리브 나무, 풍력발전기, 주말마다 열리는 야시장, 언덕과 산꼭대기에 있는 작은 동네, 텔레비전 안테나, 셀프 바, 우산처럼 생긴 소나무, 싸지만 괜찮은 호텔, 연착하는 기차, 가리발디와 쥐세페라는 이름의 거리, 동상, 나도 모르는 사이에 씌워져 있는 바가지요금, 바닷가의 기차역, 귀를 아프게 하는 앰뷸런스, 장갑차와 군인, 박물관과 미술관, 시티투어버스, 트램, 미끄럼틀과 시소.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다시 펜을 들었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거리의 정적, 소리를 앞질러 달리는 앰뷸런스, 군용차량들, 검은색 옷 입은 사람들의 행렬, 조화, 할 일 없는 밀라노 광장의 비둘기, 멀리 퍼져나가지 못하는 성당의 종소리, 사라진 거리의 악사들, 발코니에서만 들려오는 노래 소리, 시끄럽기로 소문난 이탈리아 사람들의 정적, 정적, 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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