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문턱
[경일춘추]문턱
  • 경남일보
  • 승인 2020.03.30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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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란 수필가
손정란
손정란

젊어 보임과 살은 사람들 사이에 이야기의 첫머리가 된 지 오래되어서 그럴까. 낯선 사람을 만나더라도 서슴없이 말을 하는데 예의 없는 짓이라는 걸 잊어버린다. 참 젊어 보이네요, 라거나 날씬하다는 말은 맞은바라기로 앉은 사람의 마음을 확 풀어버리게 만드는 것임을 다 알고 있다. 말치레라고 해도 입 꼬리가 올라간다. 손사래를 치면서도 그 말 듣기 좋네, 어느새 축 늘어졌던 온몸에 파르르 생기가 오른다.

한국전쟁의 언저리에서 태어난 나는 윗세대가 누리지 못한 교육을 받은 세대이다. 그런데 우리가 배우고 익힌 것은 전통을 이어가야 한다는 내용을 밑바탕에 깔아놓고 있었다. 한 집안의 안주인이 되었거나 직장에 다녔거나 오로지 목표는 어진 어머니이면서 착한 아내였다. 살아가면서 스스로 느끼는 감정이거나 꿈을 한껏 드러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삭혀냈다.

그들은 자신의 일생을 책으로 엮어내면 소설 책 열두 권에 담아도 모자랄 것이라고 풀쳐생각하며 말한다. 온갖 어려움을 다 겪어낸 윗세대 여성들과 견주어보면 어림없겠으나 나도 결혼하고 마흔여섯 해를 이어온 삶을 풀어놓으라면 아마도 열 권은 채울 것 같은데. 이 땅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은 가슴 속에 하고픈 말을 차곡차곡 쟁여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한 켜, 한 켜씩 서른 해만 쌓아 나가도 저절로 터져 나오는 거니까.

나는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는 구호에 따른 모범생이다. 대여섯이 보통이었던 자식들 먹이고 가르치느라 자신의 몫을 챙기기는커녕 아예 옆도 돌아보지 못한 그들과는 다르다. 일흔의 문턱을 넘으면서 자식들이 나를 돌보아줄 것이라는 바람은 일찌거니 접어 두었다.

그러하나 마음의 준비에는 영 서툴렀다. 이냥저냥 글을 쓰면서 여행도 다니겠다는 두루뭉술한 그림만 그렸다. 어느 날 갑자기 돌보아야 할 아이들이 떠나고 없었다. 둘밖에 안 되는 아이들은 빨리 커버렸고 둥지가 비워진 뒤로 내 이름 옆에는 손톱묶음이 쳐지고 그 안에 숫자가 쓰이기 시작했다. 달달한 것에 입맛이 당긴다. 저녁 아홉 시 뉴스를 보다가 까무룩 졸고. 반가운 이를 만난 찻집에서 싱겁게 탄 커피를 마셨는데도 눈썹씨름으로 하룻밤을 지새우면 기운을 되찾는 데는 하루나 이틀이 걸린다. 시내버스에 오르면 어디 빈자리가 없나, 눈돌림질부터 한다.

도닥도닥 자판기 두드리며 한참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 몸이 찌뿌둥해져서 기지개를 켰더니 여기저기서 뼈들이 우우우 만세를 부른다. 얼핏 보니 창밖에 새벽빛이 궁싯거리고 있었네. 에그, 내일도 내 몸을 다독거리면서 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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