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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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20.04.01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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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환 하동주민공정여행놀루와(협)대표
조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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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배꽃을 좋아한다. 한 때 그 꽃을 좋아하여 홍길동 꽃이라고 명명했던 적이 있다. 며칠 피었나 싶다가 어디론가 ‘휭’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자칫 한 눈 팔면 꽃이 피었는지 조차 모를 때도 있다. 배꽃보다 더 좋아하는 꽃은 돌배나무 꽃이다. “그게 그것 아냐?” 라고 하겠지만 분명 다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대부분 산자락이나 동네 어귀 정도에 고목으로 서 있는 돌배나무 꽃은 집중 관리로 열매의 크기와 수량만 치중하는 일반 배의 꽃과는 완전히 다르다. 돌배나무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야생인 경우가 많다. 나무의 크기도 10m가 넘는 것이 일반적이고 둥치도 한 아름이 넘는다. 이 꽃이 일순간 피어날 때에는 주변 골짜기가 수백만 와트의 백열등이 켜 진 것보다 더 환하다.

집 앞 작은 밭 가장자리에 홀로 서 있었던 돌배나무가 며칠 서울에 다녀온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땅 주인이 집터를 마련하기 위해 토목작업을 하면서 나무를 다른 쪽으로 옮겨버린 것이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때 쓴 시가 하나 있다.

-돌배나무 잔상-며칠 집을 비운 사이/사립문 앞 배나무 밭/ 나무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곁에 섰던 고목 돌배나무도 흔적이 없다/눈 앞 천지에/돌배나무 꽃이 일시에 피어나더니/함박눈 맞은 듯 포근하다/달포가 지난 오늘도 눈꽃/피고지고 할 것 없이/마냥 피어있다.

이 때에 비로소 나는 돌배나무의 위력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사라진 후의 일이다. 해마다 피고 지는 일상이었을 때는 잘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떠난 후에 알게 되는 이 무지막지한 현실인식 능력. 한 번은 ‘ㅈ’ 작가가 내가 일하는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것도 근무가 시작되는 아침9시경이었다. 불과 닷새 전에 세상을 떠난 자신의 동생을 가장 마지막에 본 사람이 나이기에 혹시나 나에게 동생의 흔적이라도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나는 ‘ㅈ’ 작가의 눈만 한 동안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ㅈ’ 작가도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돌아 섰다.

그 후로 내게는 하나의 습관이 생겨났다. 사람이 떠난 후 머물렀던 자리에서 그 사람의 향기 맡기다. 지금도 사무실을 찾아왔던 사람들이 돌아갈 때에는 학교 운동장이었던 마당을 벗어나 대문에서 사리지기까지 그 뒷모습을 지켜보는 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가끔씩은 사라진 뒤에도 한 동안 그 자리에서 서서 사라진 사람을 떠 올려보기도 한다. 그 시간이 진정의 그 사람과 만나는 시간이다. 사람은 뒷모습이 앞모습이다. 머물렀던 자리가 진짜 그의 자리다. 이화(梨花)에 월백하고.

조문환 하동주민공정여행놀루와(합)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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