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왕자 마른 보이
바다의 왕자 마른 보이
  • 김성진 진주문협 사무간사
  • 승인 2020.04.06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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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진 진주문협 사무간사
김성진

고방에 선물꾸러미들이 쌓여있다. 집들이와 명절 때 손님들이 들고 온 것이다. 주신 분들의 고마운 마음을 생각하며 정리하다가 특이한 선물 하나에 눈이 갔다. 조그마한 멸치 상자다. 상자 안에 빼곡히 누워있는 멸치를 보며 입이 삐죽거렸다. ‘아니, 무슨 선물이 이래, 줄 게 없으면 깔끔하게 비누나 치약 세트를 줄 것이지 멸치가 뭐야, 멸치가.’

괜한 불만을 가지며 한 마리를 집어 든다. 머리와 내장을 바른 뒤 입으로 가져갔다. 짭조름한 맛이 씹을수록 고소한 맛으로 바뀐다. 문득 멸치는 참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멸치처럼 말랐다느니, 멸치처럼 속이 새까맣다느니, 멸치 대가리 같다는 등 부정적인 비유가 떠오른다. 멸치에 비유한 말 치고는 좋은 말이 없다.

하지만 음식에서만큼은 그 존재가치가 빛난다. 생멸치는 젓갈을 담기도 하지만, 멸치는 대부분 잡자마자 찜통에서 찐 후 마른 멸치로 유통한다. 작은 멸치는 주로 볶음이나 조림으로 사용하고 큰 멸치는 대부분 육수를 우려내는 데 사용한다. 서민의 대표 음식 국수는 멸치로 우려낸 게 아니라면 그 맛은 밋밋하기 짝이 없다. 귀찮더라도 반드시 멸치로 육수를 우려내야 한다. 이탈리아나 스페인, 일본 등에서는 멸치가 최고급 요리 재료로 쓰인다.

멸치의 실제 쓰임에 비해 하찮은 존재로 비유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학벌주의, 외모지상주의, 영웅주의 같은 개인주의가 만든 비유 언어 때문은 아닐까.

멸치 하나를 다시 입에 문다. TV에서 수없이 보았던 가슴 아픈 농어촌의 현실들이 떠오른다. 수확할 농산물이 투자비도 되지 않아 밭을 갈아엎고, 중국산 수입 농수산물에 밀려 인건비도 건지지 못하는 현실이다. 마늘 파동, 고추 파동, 양파 파동, 낙지 파동, 문어 파동까지…. 해마다 되풀이되는 농수산물 파동을 보면 멸치 파동도 오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다.

서해 앞바다는 중국 배들이 한강 입구까지 들어와 불법조업으로 치어까지 씨를 말리고 있다. 우리 어민들이 애써 잡은 고기는 수입 산에 밀려 경쟁을 잃어간다. 어부의 주름진 얼굴이 말라 굳은 멸치와 겹쳐진다. 그런 아픈 현실을 생각하니 멸치 선물을 보고 투정을 부린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속이 훤히 다 보이는 우리 서민들이 세상의 맛을 내듯, 진정 바다의 주인공은 멸치가 아닐까. 평생 멸치를 사 볼 날이 몇 번이나 있을까. 멸치 상자를 조심스럽게 닫으며 멸치에게 다시 말한다.

“멸치야, 너를 몰라봐서 정말 미안해, 넌 바다의 왕자 마른 보이야!”

김성진 진주문협사무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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