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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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20.04.09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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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시 ‘진주’로 널리 알려진 서울상대 출신 허유 시인(3)
진주 인근 시군에서 진주로 와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유달리 진주를 좋아하고 사랑했다. 허 유 시인이 더 그랬다. 시집 ‘우리 金兄에게’를 읽으면 이점 확인할 수 있다. 세 번째 나오는 시 제목이 ‘진주 축구대회’다. 진주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들이 잊지 않고 추억에 잠기는 것으로 진주성 촉석루, 남강 의암, 백사장, 뒤벼리, 개천예술제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1950년대 중반의 진주 추억을 말할 때는 ‘축구대회’를 빼놓을 수가 없다. 허 유 시인도 틀림없이 진주 예찬파에 속한다.

“진주 축구대횟날/ 마침 비봉산은 점심을 들고/ 알맞게 낮잠을 자다 깨었다// 진주 축구대횟날/ 일흔일곱 된 늙은 기생 할머니가/ 새하얀 이빨을 하고/ 서장대 옆구리에 진을 치고,/ 신세타령 두어봉지를 잘 팔고 있었다//진주 축구대횟날/ 모두 반은 미쳐서 있다가/ 밤중에는 또한 모두 아들놈의 신발짝들을 찾고 있었다.”

진주 축구대회가 얼마나 진주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진주 주산인 비봉산도 들뜨고 점심때 지나 낮잠을 잔 뒤 깨어서 아마도 진주중학 운동장에서 열리는 4도시 축구대회가 열리는 운동장으로 가서 337박수를 치거나 함성을 지르며 응원의 대열에 합류한다는 것이리라. 진주에서 50년대 축구대회가 열리는 장소는 주로 진주중학 운동장이었다. 50년대 축구대회는 영남 4도시 즉 진주 마산 부산 대구가 참가하는 대표팀과의 리그 또는 토너먼트 방식의 게임인 것이다. 진주의 축구대회는 광복 이전에는 서울 평양 대구 진주 4도시 대항전으로 유명했다.

그러니까 볼거리 운동이 거의 없었던 시절 진주축구대회는 진주의 퇴기(기생)들도 들떠서 함지박에 과일을 담아 길거리 나와 난전을 펼쳤다는 것이다. 시에서 ‘늙은 기생할머니’가 참여하였다는 것은 진주의 남녀노소 기생 걸인 할 것 없이 통털어 나왔다는 말일 것이다. 시는 그 대회날 진주사람들은 반은 미쳐 있었다고 증언한다. 승부욕에 반은 미쳐 있고 관전 욕에 또 반은 미쳐 있었다는 것일까. 진주대표팀이 조선축구의 정상에 있었던 것임을 간접적으로 말하주고 있는 셈이다. 일제때 진주 축구의 상징은 별칭 오토바이 곧 우정환선수였다. 이쪽 골대에서 저쪽 골대까지 볼을 땅에 놓지 않고 몸에 붙이고 달려갈 수 있었던 환상의 선수, 여기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필자의 기준으로 놓고 보면 20대 신혼일 때 진주 장대동에서 셋방살이를 했는데 주인 어른이 1950년대 중반 진주 축구 올팀 풀백 서 모 선수였다. 그 풀백은 진주 생선시장 가게를 하신 분으로 ‘이른바 똥볼’(공중차기) 올리기에 국제급이었다. 이 분은 더러 필자의 진주고 한 해 후배(32회)인 국가대표로 활약한 정강지, 홍경구 선수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이 두 국가선수 이후 9년 후배에 조광래 선수가 혜성처럼 나타나 우리나라 축구의 링크로 자리를 굳건히 했었다. 한국축구사에 취약한 허리를 메꾸어 주는 허리전술이 조선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 아마츄어들의 추단이었다. 이런 선수들에 이르는 진주 축구의 배경에는 1970년대 초반 진주고등학교 축구를 전국 3관왕으로 올려놓는 데 견인차가 된 김용하 지도자 같은 숨은 공적이 있었음을 기억할 수 있다.

시 ‘진주 축구대횟날’에서 특히 “밤중에는 또한 아들놈의 신발짝들을 찾고 있었다”에서 보면 아들이라는 아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응원하다가 저녁에는 한 잔 후렴잔치를 하느라 야간 통금을 어긴 것인가 점검한다는 이야기가 재미 있다. 이렇게 비봉산도 들떠서 오후부터 운동장을 내려다보고 늙은 기생도 한 군데 있을 수가 없어 난전으로 나와 분위기에 함께 취하는 것이 볼 만하고 아이들은 다들 어우러져 술판을 벌이는 것이 진주 축구대회날이다.

허 유 시인은 진주시절에 한 해 후배인 성종화와 친했다. 성종화는 1955년 진주 개천예술제에서 고등학교 2학년때 백일장 통합 장원을 차지한 사람이었는데 같은 백일장에서 허 유 시인은 입상에 올랐다. 같이 입상한 사람으로 제주도 김종원, 마산에 이제하, 마산에 김병총 등이었다. 쟁쟁한 문사들의 한 자리 축제였다. 성종화 시인의 기억에 의하면 허 유 시인은 성격이 반듯하고 원칙적이어서 좀체로 가까이 하기에 어려운 면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종화 시인은 허 선배가 문예반에서 같이 활동했으므로 자연 친해질 수 있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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