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17) 초오유 남동벽 눈물의 후퇴
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17) 초오유 남동벽 눈물의 후퇴
  • 경남일보
  • 승인 2020.04.19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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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태에 쓸려간 세계 초등의 꿈
삼천포산악회, 1989년 동계 초오유 등반
경남 단일산악회 최초 8000m 겨울철 도전
벨기에팀과 갈등…자연의 벽 앞에 돌아서
초오유 남동벽 전경
“초오유 남동벽은 2000년대 안에는 그 루트를 뚫지 못할 것이다.” 라인홀트 매스너.

1980년대 세계 산악계를 이끌었던 라인홀트 매스너는 초오유 남동벽 등반을 이렇게 표현했다.

삼천포산악회는 1989년 11월 한국 최초로 겨울철 미등 루트인 초오유 남릉 도전에 나섰다. 그러나 7600m에서 눈사태로 셰르파를 잃었다. 이어진 대형 눈사태로 등반을 포기하고 아쉽게 돌아서야 했다. 만약 원정대가 일찍 철수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눈사태에 휘말렸을 것이다. 그들은 인간만사 새옹지마(人間萬事 塞翁之馬)를 실감했다. 삼천포산악회 창립 10주년(1979년 3월 17일)을 기념한 것으로 당시 시대를 앞선 등반이었다.

삼천포산악회는 1988년 늦은 가을 네팔 초오유 남릉 등반을 위해 현지로 떠났다. 정영환 단장을 중심으로 이호상 원정대장·강덕문 부대장·임명동(장비)·이채한(식량)·박정헌(회계)·장현규(수송) 7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원정대였다. 삼천포라는 작은 도시에서 누구의 등정을 허락하지 않은 세계 6위봉 남릉 루트를 오른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도전이었다. 자금 조달에서부터 모든 준비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은 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남릉 보는 순간 소름 돋아”

1988년 12월 10일 해발 5200m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다. 그들은 초오유 남벽과 마주했다. 현지에서 바라본 남벽은 등반이 불가능해 보였다. 강덕문 부대장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사진에서 보던 남벽을 실제로 바라보니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등반이 불가능해 보였다. ‘과연 저 루트로 오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많은 산악인이 초오유를 ‘청록의 여신이 거주하는 산’이라며 비교적 쉽게 오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루트는 티베트에서 오르는 것이다. 반대편 네팔 쪽 초오유 남벽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네팔에서는 남릉이나 남동벽으로 등반할 수 있지만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라인홀트 매스너가 언급했듯이 남벽과 남동벽은 철옹성이었다. 그 어느 팀도 성공하지 못한 루트였다. 남릉은 접근조차 힘들어 보였다. 남릉으로 어느 정도 진출하면 남동벽으로 방향을 잡으면 성공 가능성이 보였다.
등반루트

 

등반 가능성 높은 남릉→남동벽 변경

원정대는 정부연락관에게 루트 변경을 통보했다. 남동벽은 벨기에팀이 등반하고 있었다. 12월 12일 5350m에 전진캠프(ABC: Advanced Base Camp)를 설치해 식량과 장비 수송에 시간을 단축하기로 했다. 12월 16일에는 임명동·박정헌 대원이 1캠프(6300m)를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ABC~1캠프 구간은 표고 차가 1000m로 빙하와 세락()을 지나 쿨르와르()를 통과한 후 계단식 수직 벽을 몇 번 올라서야 하는 긴 구간이었다. 대원들의 안전을 확보하고 원만한 짐 수송을 위해 급경사 부분에 고정 로프를 많이 깔았다. 1캠프는 눈사태를 피할 수 있고, 바람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가능하면 능선 가까이 설치했다. 벨기에팀과 합동으로 등반한 루트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로프가 중간중간에 잘려져 있었다. 박정헌 대원이 무전으로 이 사실을 알렸다. “벨기에팀이 우리가 설치한 고정 자일을 자르고 회수했다.” 강덕문 부대장은 대원들을 타일렀다. “자연적인 현상으로 자일이 잘릴 수도 있다. 동요하지 말고 자일을 다시 설치하라.”

벨기에팀 로프 절단…일촉즉발

ABC에 도착한 강덕문 부대장은 벨기에팀에게 1시간 넘게 자일 절단 사건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고 해명을 요구했다. 그는 “벨기에가 먼저 등반을 하고 있었고, 루트를 함께 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은 고마운 일이다. 우리가 루트를 변경하고 서로 방해가 되지 않도록 등반을 하자고 인사했다. 우리가 설치한 고정 자일이 혹시나 그들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아 거리를 두고 설치했다. 그런데 어렵게 설치한 고정 자일을 끊었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정확하게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한국 원정대에 참여한 셰르파들이 모두 내려와서 합세했다. 그들은 상당히 흥분한 상태로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강 부대장은 셰르파들을 일단 진정시켰다. 그러나 벨기에팀은 끝까지 부인으로 일관했다. 대원들과 셰르파들은 벨기에팀 텐트 뒤에서 삼천포팀의 아이스하켄과 고정 자일을 찾아냈다. 순간 강 부대장은 그들의 거짓에 환멸을 느꼈다. 벨기에는 대원 4명 중 2명은 고소로 인해 헬기로 하산한 상황에서 합동 등반을 제의했다. 하지만 이호상 대장이 베이스캠프에 도착하지 못해 합동 등반에 대해 확답을 주지 않은 상황이었다.

박정헌은 회고했다. “스스로 등반이 힘들다고 판단하고 포기했으면 깨끗이 철수하는 것이 산악인들의 올바른 자세다. 남아서 힘들게 도전하는 팀에게 격려는 못해주고, 치명적인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로프를 잘라내는 부도덕한 일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고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다.”

 
베이스캠프
1캠프로 향하는 대원들.
1차 공격조…강덕문·셰르파 2명 뽑혀

결국 원정대는 고정 자일을 다시 설치하느라 소중한 3일의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12월 20일 임명동·박정헌 대원, 앙 체링은 2캠프(6900m)를 건설했다. 이제 남동벽은 가장 중요한 3캠프(7900m)만 남겨놓고 있었다. 3캠프로 가는 구간은 가파르고 어려운 설벽과 빙벽 혼합지대였지만 만약 3캠프를 건설하면 성공에 도전할 기회를 얻게 된다. 12월 22일 2캠프로 짐을 옮기느라 힘든 상황이라 휴식했다. 다음날 이호상 대장은 1988년 12월 28일을 ‘D-day’로 정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1차 등정자로 강덕문 부대장과 앙 락파·앙 체링이 뽑혔다. 그들은 12월 23일 1캠프로 향했다. 12월 25일 초오유 남동벽 2캠프에서 강덕문 부대장은 심한 두통을 앓고 있었다. 전날 2캠프에 도착한 강 부대장은 베이스캠프를 출발한 이후 1000m 이상 고도를 높이는 바람에 두통과 함께 움직이기도 쉽지 않았다. 그는 사다 앙 락파와 앙 체링에게 이날 오후 4시까지 3캠프로 귀환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셰르파들에게 제안했다. “하루 휴식하고, 내일 등반을 시작하자.”

강덕문 부대장 컨디션 난조…계획 차질

그러나 셰르파들은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앙 락파 셰르파는 “등정 날자를 28일로 잡았다. 이날 하루 쉬면 등정은 늦어진다. 올해를 넘기고 해가 바뀌면 겨울이 더 깊어져 성공 가능성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우리가 먼저 출발해 루트를 뚫어 놓겠다. 강 부대장은 캠프에서 두통이 없어질 때까지 휴식을 취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강 부대장은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3캠프로 가는 경사가 90도 가까운 오버행 등반은 위험하다. 어느 정도 진출한 후 캠프로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1캠프에 있던 이호상 대장은 강 부대장의 컨디션 난조에 난감한 입장이었다. 실제 등반을 책임지고 있는 강 부대장의 컨디션은 전체 등반을 좌지우지할 정도였다.

2~3캠프 구간은 텐트를 칠만한 공간이 없을 정도로 경사가 심한 설사면이었다. 설벽 높은 곳에 있는 오버행 암벽이 최상의 캠프 사이트였다. 만약 이곳에 3캠프를 설치하면 남동벽을 등정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는 이번 등반의 최대 난코스였다. 이호상 대장은 “3캠프를 세운다면 등반의 절반 이상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3캠프에 도착한 대원은 하산시키지 않으려는 방침이었다. 그런데 강덕문 부대장이 탈이 나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고 말했다.

결국 이 대장은 강 부대장에게 휴식하고, 셰르파들에게 루트를 개척하라고 지시했다. 동시에 1캠프에 있는 임명동 대원과 핀조 셰르파를 2캠프로 올라가라고 무전을 보냈다.

 
네팔과 티베트초오유-출처 7summitsclub.com
갑작스러운 추락, 그리고 눈사태

12월 25일 앙 락파 셰르파 등 3명은 400m 고정 자일을 설치하면서 오후 3시쯤 7600m까지 진출했다. 어느 정도 큰 성과를 거둔 등반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선두에 있던 앙 락파가 갑자기 넘어져 미끄러졌다. 그는 하얀 눈보라를 일으키며 약 200m 정도 추락한 후 멈춰 섰다. 다행히 더 이상의 추락은 없었지만 앙 락파의 움직임이 없었다. 한 시간 후 사고 소식을 들은 강덕문 부대장과 임명동 대원, 핀조 셰르파가 사고 현장으로 출발했다.

이호상 대장은 “구조대에게 앙 락파가 떨어진 지점으로 직접 가지 말고, 다른 셰르파가 만든 루트를 따라 올라가라.”고 지시했다. 이호상 대장은 앙 락파가 전혀 움직이지 않아 사망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정확히 확인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단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사라진 앙 락파 셰르파

구조대가 7300m 정도 올라갔을 때 앙 락파가 매달려 있는 사면에서 거대한 눈사태가 일어났다. 엄청난 눈사태는 1캠프와 2캠프를 살짝 비켜갔지만 전 사면을 휩쓸고 지나갔다. 눈사태에 이어 엄청난 후폭풍이 대원들을 뒤흔들었다. 강한 바람에 눈보라가 시야를 가렸다. 한동안 꼼짝도 하지 못했다. 대형 눈사태에 이어 작은 눈사태가 잇따라 발생했다. 눈보라가 가라앉고 겨우 정신을 차린 대원들은 앙 락파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의 시신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눈사태가 그의 시신을 함께 삼켜버렸다. 대원들은 눈사태가 자신들을 비켜나가 무사할 수 있었다. 만약 눈사태가 대원들 방향으로 왔다면 전원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호상 대장은 다음날 전원 철수 명령을 내렸다. 대원들은 3캠프를 설치한다면 정상 등정도 가능하다며 다시 도전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호상 대원은 하산을 지시했다. 강덕문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대원들은 8000m급에서 새로운 루트를 올라 ‘초오유 남동벽 세계 초등’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재등반하자고 했다. 그동안 준비한 시간과 훈련, 그리고 어렵게 마련한 경비로 원정을 떠나온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리더를 잃고 슬픔에 빠진 셰르파들도 생각해야 했다. 셰르파들의 분위기는 등반이 불가능했다. 무엇보다도 티베트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때문에 더 이상 등반은 무모한 욕심이라고 생각해 계속할 수가 없었다. 단 한 번의 눈사태는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갔다.”

삼천포산악회는 창립 10주년 사업으로 어렵게 준비한 초오유 남동벽 세계 초등의 꿈은 이렇게 날아갔다. 이호상 대장은 1985~1986년 캉테가 등반 당시 만났던 라인홀트 매스너의 조언을 떠올렸다. “2000년대 안에는 그 루트가 뚫리지 않을 것이다.”

박명환 경남산악연맹부회장·경남과학교육원 홍보팀장

 
89-90한국동계초오유원정대

초오유 남동벽
1978년 10월 27일 오스트리아 에디 코브뮐러(Edi Kobmueller)와 알로이스 후트너(Alois Furtner)가 초등했다. 일명 ‘오스트리아 루트’나 초등자 이름을 딴 ‘코브뮐러-후트너 루트’로 불린다. 룽삼파 빙하 가장 위쪽 설원에서 약 3000m에 달하는 동벽을 오르다 피크8010 하단부에서 정상부를 향해 비스듬히 횡단하다 남동릉 오른쪽 설벽을 따라 정상에 이르는 루트를 말한다. 코브뮐러와 후트너는 3개 캠프(5250m, 6600m, 7400m)를 설치 후 등정했다.

[취지문]
‘8000m를 향하여’
‘89-90한국동계 히말라야 초오유원정대 원정대장 이호상

와룡산에서 꿈을 키워 온 삼천포산악회 청년부 대원들은 오직 산에 대한 자신의 정열을 히말라야에서 확인하고 싶어졌습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그동안 와룡산에서, 지리산으로, 인수봉으로, 그리고 설악의 토왕폭에서 젊음의 용기와 인내를 배우며 기술을 익혀오면서 오르겠다는 집념 하나만으로 이어온 지 벌써 10년을 맞이하였습니다.

본회 창립 10주년을 맞이하면서 오랫동안 꿈꾸어온 세계 6위봉 초오유 등반을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훈련 등반을 통하여 대원들의 팀워크를 다지면서 체력 강화 및 투철한 산악정신으로 용기를 심어 오면서 반드시 성공하고자 하는 의지일 뿐입니다.

히말라야를 가겠다는 용기를 이 고장에서도 성원해 주시길 바라면서 이번 원정이 계획되기까지 본회 이사님 이하 여러 회원님들의 고고에 감사드리오며, 초오유 정상에 태극기와 본회의 깃발이 휘날릴 수 있도록 관계기관 및 산악 동호인, 회원 여러분의 성원을 부탁 바라면서 원정대원 모두는 신념으로 성공된 등반이 될 수 있도록 약속 드리겠습니다.
198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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