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18) ‘운명의 산’ 낭가파르바트(상)
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18) ‘운명의 산’ 낭가파르바트(상)
  • 경남일보
  • 승인 2020.04.26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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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절로 애국가가…‘코리안 스텝’ 뚫은 산 사나이들
10시간 도전 끝에 낭가파르바트 한국 첫 등정
8000m 고산 중 가장 많은 희생자 낸 ‘산중의 산’
“같이 죽느냐? 친구를 버리고 혼자 내려가느냐. 정말 수백 번 아니 수천 번도 더 고민했다.”-박희택 대원.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같이 죽어라. 살아서 내려올 수 있다면 데리고 내려오라.”- 원정대장 조형규.

1992년 6월 29일 오후 3시 15분 해발 8125m 낭가파르바트 정상.

박희택은 4캠프를 출발한 지 10시간 만에 꿈에도 그리던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서 있었다. 그는 ‘운명의 산’ 최정점에서 세상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간절하게 등정 소식을 기다릴 원정대를 생각하면서 베이스캠프에 무전을 보냈다. “여기는 정상이다. 가장 높은 곳에 섰다. 정상이 틀림없다.”

순간 베이스캠프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대원들은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등정의 기쁨을 눈물로 표현했다. 이윽고 애국가를 불렀다. 누가 선창했는지 모르지만 모두 애국가를 부르고 있었다.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이미 그들의 볼에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강인한 산 사나이들의 눈물은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조형규 원정대장 역시 영광과 등정을 위하여 숱하게 흘린 지난날들을 생각하며 자신도 모르게 하얀 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경남산악연맹은 세계 8000m 산 가운데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운명의 산’ 낭가파르바트 정상을 앞두고 새로운 루트를 통해 정상에 서면서 ‘코리안 스텝’이라는 새로운 루트를 만드는 성과를 올렸다. 특히 무산소 등정과 셰르파나 고소포터 없이 대원들 단독으로 성공시킨 의미 있는 등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낭가파르밧원정팜플렛초청장
낭가파르바트는 우르두어로 ‘벌거벗은 산’이라는 뜻으로 세계 8000m 가운데 가장 잔인한 산으로 악명이 높았다. 낭가파르바트 주변에 사는 현지인들은 ‘산중의 왕’을 의미하는 ‘디아미르(Diamir)’라고 부르며 숭배한다. 하지만 셰르파들 사이에서는 ‘죽음의 산’으로 기피 대상 1호인 산이다. 파키스탄에 위치한 낭가파르바트를 네팔 셰르파들이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수많은 선배 셰르파들의 목숨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낭가파르바트는 인류가 최초로 8000m를 도전한 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알피니즘의 창시자인 영국의 알버트 머메리(1855~1895)는 125년 전인 1895년 낭가파르바트에 도전했다. 그는 6000m를 넘어섰지만 8월 24일 2명의 구르카 병사와 함께 실종됐다. 머메리는 정상을 등정하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 루트를 따라 올라갔는지가 중요하다는 ‘등로주의’를 주창한 산악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도전이 무모한 것임을 알았지만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기꺼이 하얀 산에서 죽음을 맞이한 진정한 알피니즘 개척자로 현재까지 평가받고 있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 국민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해 8000m 등반에 나섰다. 국가적 지원을 받은 독일 산악인들이 선택한 산은 바로 낭가파르바트였다. 그러나 낭가파르바트는 독일인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은 산이었다. 1932년 독일 1차 원정대가 실패로 끝나고 1934년 2차 도전에 나섰다. 원정대는 악천후로 하산을 하지 못하고 버티다 독일인 4명과 셰르파 6명이 목숨을 잃었다. 1937년 6월 15일 자정께 낭가파르바트 초등을 노리던 독일 원정대는 4캠프(6180m)에서 눈사태에 휩쓸려 대원 7명과 셰르파 9명이 사망하는 히말라야 최대 참사를 겪었다. 1938년에는 대원 1명과 포터 1명이 사망하면서 독일인이 낭가파르바트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28명으로 늘어났다. 독일은 20여 년간 이곳에서 6차례 도전에 28명의 목숨을 잃은 후 1953년 헤르만 불이 단독으로 8000m에서 비박을 하며 등정하는데 성공했다. 헤르만 불은 혼자서 41시간 만에 살아돌아오는 기적을 연출하며 세계 초등을 독일에 안겨주었다. 세상 사람들은 낭가파르바트를 ‘독일의 산’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도 낭가파르바트에서 희생을 피해가지 못했다. 1989년 전주대OB 낭가파르바트원정대와 1990년 광주낭가파르바트 원정대는 김광호 대원과 정성백 대원을 잃기도 했다.

경남은 1990년 들면서 세계 8000m 14개 봉우리를 모두 오르겠다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마련했다.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걸림돌이 된 것이 바로 낭가파르바트였다. 산악인들은 낭가파르바트의 혹독한 등반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경남의 산악인들은 낭가파르바트 원정 계획을 세우고 치밀한 준비와 함께 엄격한 훈련을 거쳐 대원을 선발했다.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원

낭가파르바트를 등정하기 위한 선봉장은 조형규 원정대장이었다. 그는 1989년 눕체 동계 세계초등을 이끌어내 국내는 물론 세계 산악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조형규 대장은 “1988~1989년 겨울철 동계 눕체 세계 초등을 달성한 경남 산 사나이들의 능력과 끝없는 도전 정신은 8000m 자이언트봉을 충분히 등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낭가파르바트는 한국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으로 생각했다.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 표고 차가 에베레스트 3500m에 비해 1000m가 더 높은 낭가파르바트를 경남의 산악인들이 꼭 정상에 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원정대를 구성했다”며 원정 배경을 밝혔다.

원정대는 조형규 원정대장을 비롯해 이병갑 부대장, 배현철 등반대장, 박희택, 박쾌돈, 임영택, 송재득, 임종범, 강덕문, 김화곤, 오세철, 이은수, 정영상, 이명용 대원이 참가했다.

1992년 5월 27일 원정대는 푸른 초원이 펼쳐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3500m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낭가파르바트 베이스캠프는 8000m 14개 베이스캠프 가운데 가장 낮아 접근이 쉽고, 자연경관이 가장 빼어난 곳이다. 그러나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는 45000m가 넘는 표고차를 극복해야 하기 때문에 가장 등반하기 어려운 산이기도 하다. 베이스캠프에는 경남연맹을 비롯해 광주 우암산악회팀과 서울시연맹도 함께 했다. 대원들은 충분한 휴식을 가진 후 등반을 시작했다. 그러나 시작이 좋지 않았다. 대원들은 두 번의 눈사태를 맞았지만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열흘간의 루트 작업 끝에 이번 등반의 최대 고비인 수직 200m의 대암벽 지대를 돌파하며 6월 10일 2캠프(6200m)를 설치했다. 경남연맹은 당시 광주 우암팀과 서울시연맹과 공동으로 루트 작업을 실시해 6월 24일 5시간에 걸쳐 얼음을 깎아내 3캠프(6800m)를 설치했다. 그리고 4일 뒤 원정대는 정상으로 가는 마지막 캠프인 4캠프(7550m)를 건설하는데 성공했다.

조형규 대장은 고민 끝에 정상 공격을 곧바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그는 6월 29일을 ‘D-day’로 정하고 1차 정상 공격조는 박희택·송재득·임영택 대원으로 결정했다. 그날 저녁 조형규 대장은 저녁 정상 공격조에게 무전을 보냈다. “저녁은 잘 먹었나? 긴장되겠지만 잠 잘 자고 내일 정상에 갈 때 광주 우암팀과 함께 정상에 같이 서라. 그리고 내일 아침은 꼭 먹고 출발해라.” 그는 한숨도 자지 않고 기도를 올렸다. “대원들이 무사히 등정하고, 안전하게 베이스캠프로 하산해 달라고….”

6월 29일 새벽 2시. 베이스캠프는 싸늘한 냉기가 맴돌았다. 베이스캠프에 있던 모든 대원들은 대장 텐트로 모였다. 조형규 대장은 4캠프에 있는 대원들을 무전으로 호출했다. 박희택 대원이 보고했다. “지금 일어나서 물을 끓이고 있습니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준비가 끝나면 곧바로 정상 공격을 시작하겠습니다.” (하편에 계속)

박명환 경남산악연맹 부회장·경남과학교육원 홍보팀장

 

낭가파르바트 원정가. 조형규 대장은 원정의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원정가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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