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혈처럼 담아낸 난중일기의 처절한 투병 기록
선혈처럼 담아낸 난중일기의 처절한 투병 기록
  • 임명진
  • 승인 2020.04.28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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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제475주년 탄신일 기념특집 '이순신과 전염병'

당시도 청결, 사회적 거리두기, 격리가 예방법
왜군과 전투앞두고 병력 분산·청결 엄두 못내
폐쇄공간 선박안에서 조선수군 진퇴양난 고난
<목차>
1. 전염병이 조선수군을 덮치다
2. 뭉치면 전염병이, 흩어지면 일본군이
3. 무패의 신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몸이 몹시 괴로워서 않고 눕기조차 불편했다.(1594년 3월6일)

-병세는 별로 차도가 없다. 기운이 더욱 축이 나서 종일 앓았다(3월8일)

-기운이 좀 나는 듯 해 따뜻한 방으로 옮겨 누웠다. 열기는 차올라 그저 찬 것만 마시고 싶은 생각뿐이다(3월10일) #난중일기 중



조선수군의 최고 지휘관인 이순신 장군 마저 감염될 정도로 전염병의 확산은 심각했다. 특히 1594년부터 기근마저 겹쳐 전염병의 피해가 더욱 극심해 졌다.

당시 난중일기를 보면 굶주리고 병들어 죽은 자들에 대한 언급이 여럿 기록돼 있다.


‘소비포권관 이영남에게서 영남의 여러 배의 사부(배에서 화살을 쏘는 병사) 및 격군(노젓는 병사)이 거의 다 굶어 죽겠다는 말을 들으니 참혹해 차마 들을 수가 없다’(1594년 1월19일)

‘녹도만호(송여종)가 와서 보고하는데, 병들어 죽은 시체 이백 열 네명을 거두어서 묻었다’(1월21일)



전염병에 걸린 이순신에게 자제들이 잠시 휴양을 권했으나 “장수된 자가 죽지 않았으니 누울 수가 있을 것이냐”며 계속 공무를 보았다.

하지만 부하 장수와 병사들의 희생은 피하지 못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광양현감 어영담이 전염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목숨을 잃은 것이다.

어영담(1532~1594)은 함안 사람으로 1564년 무과에 급제해 일찍부터 연해의 여러 진에서 근무하며 바닷길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첫 출전인 1592년 5월의 옥포해전에서부터 시작해 당포, 한산도, 안골포, 부산포해전 등 해전에 앞장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세간에서는 이순신이 어영담의 귀신같은 지도를 얻어 승리했다고까지 했다.

이처럼 눈부시게 활약했던 어영담은 허망하게도 1594년 4월 초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순신의 지시로 2차 당항포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지휘하며 일본 수군을 대파한지 고작 한 달만의 일이었다.

어영담을 앗아간 것은 일본군이 아니었다. 조선수군을 덮친 전염병이었다. 이순신은 유능한 장수 어영담을 잃은 충격에 크게 낙담했다.

당시의 심정은 난중일기에 남겼다.


‘어영담이 세상을 떠났다. 애통함을 어찌 말하랴’(1594년 4월 초9일)

당시 조선도 전염병 확산을 예방하고 치료하는데 무엇이 필요한지는 알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대왕 이래로 ‘감옥이 불결해 죄수들이 죽어나가는 일이 빈발하니 청결에 힘쓰라’고 지시하는 경우가 자주 보인다.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최근 자체 웹진 4월호에 소개한 바에 따르면 조선시기에 빈민의 치료를 담당하던 활인서라는 관청은 ‘출막’이라는 임시시설을 성 밖에 두고 전염병 환자를 격리해 돌보았다.

해당 웹진은 또 1579년에 전염병이 기승을 부릴 때 운 나쁘게 병에 걸린 아들은 집으로 데려오고 대신 집에 머물고 있던 건강한 가족은 다른 곳으로 보낸 사례도 적고 있다.

이 같은 사례를 보아 조선시대에도 코로나19처럼 청결, 사회적 거리두기, 격리 등이 전염병의 확산을 막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사실은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군사관학교 충무공 이창섭 연구부장은 “이순신 장군도 이런 예방법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휘하의 장병이 전염병에 희생되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격리, 청결 등의 방안을 제대로 시행할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593년과 1594년의 조선 수군은 한산도에서 버티면 전염병에 죽고 물러나면 일본 수군의 습격을 피할 수 없는 진퇴양난에 처해 있었다.

일본군이 전라도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쳐야만 했던 한산도 일대에서 조선 수군은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늘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어야만 했다.

특히 수군은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수군 특성상 장병들이 ‘배’라는 제한된 공간에 밀집해서 작전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청결상태를 제대로 신경 쓰는 건 기대하기 어려웠다. 승조원 중 누군가가 전염병에 쓰러지면 삽시간에 피해가 확산될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의 서진을 막기 위해 한산도에 1593년 7월부터 전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한산도는 산이 바다를 껴안듯 깊은 만이 형성돼 이곳에 전선을 감추면 밖에서는 안쪽을 탐지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신윤호 연구위원은 “전염병을 막기 위해서는 병력의 분산과 격리가 필수적이었지만 당시 조선수군은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에서 병력을 쉽게 분산시킬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고 말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옥포해전도(해사박물관 소장) 자료제공=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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