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대한 예의
기억에 대한 예의
  • 허정란 수필가·독서논술강사
  • 승인 2020.05.03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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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란 수필가·독서논술강사
허정란

싸리꽃이 피는 음력 사월이면 일 년에 한 번 하얀 쌀밥을 먹었다. 마흔 겨우 넘기고 돌아가신 아버지 기일이었다. 어머니는 제사상 앞에서 돌이켜 생각하며 마음 아파했으나 아이는 하얀 쌀밥을 구경할 수 있어 슬프지 않았다. 모두가 어려웠던 때이었기에 가난했던 시골 환경은, 오히려 아이들을 순박하고 굳건하게 자랄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읽을거리가 귀하던 시절, 기억하기로 월간 문학이었다. 언니 오빠가 보는 두꺼운 잡지로 내 기억에 남는 장르는 단편소설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은 병원에서 퇴원하고 마땅히 갈 데가 없어 친척 집을 찾아간다. 그녀는 잘 익은 복숭아 한 접시를 대접받는다. 몇 끼를 굶은지라 복숭아 몇 알보다 꽁보리밥 한 그릇이 간절했으나 낯이 없어 밥 한 공기 달라는 소리를 못하고 만다. 우리 가족은 홀어머니 밑에서 양푼에 가득 꽁보리밥을 비벼서 먹으며 끼니를 거른 적이 없었다. 배고픔으로 겪어야 하는 위축감이나 허기짐은 어머니가 곁에 있었기에 비껴갔다. 그때 소설 속의 화자를 통해 어머니의 사랑을 소중하게 깨달으며 짧게나마 마음을 놓았던 기억이 살아난다.

오디가 익어가는 봄철, 딱히 볼거리라곤 없던 때였다. 누에똥을 가릴 때면 어머니가 읍내 시장에서 재활용으로 이고 온 누런 신문지 뭉치를 잠박에 사용했다. 빛바랜 글자를 닥치는 대로 읽고 있으면 어머니가 호되게 나무랐다. 신문지에 얼굴을 파묻고 있으니 일손이 뒤처지기 일쑤였다. 오빠는 내게 놈팡이라는 별명까지 안겨주었다. 나와 두 살 터울인 어질고 순한 막내 여동생이 나의 일까지 도맡아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중학교 삼학년 무렵,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병환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채 이 년 동안 집안일을 도우며 농사일을 배웠다. 끼니때가 되면 보리쌀을 애벌로 삶은 후 보리쌀이 푹 퍼지도록 다시 물을 더 붓고 감자를 긁어서 밥을 했다. 밥을 풀 때는 감자를 뭉개어 보리밥이 부드러워지도록 했다. 밥 위에 얹어 쪄낸 호박잎에 된장을 곁들어 볼이 미어지도록 싸 먹는 재미는 소소한 행복이었다. 아직 코뚜레도 꿰지 못한 유난히 목이 긴 어린 소를 앞세워 리어카를 끌었으며 때로는 다섯 마지기 서풀 앞 나락 논에 약통을 짊어지고 다녔으니 놈팡이라는 별명은 어느새 사라졌다. 산 밑 밭두렁에 싸리꽃이 흐드러지게 피며 음력 사월이 오고 있다. 어머니와 함께 오래된 기억은 그리움으로, 때로는 메아리로 내 안에 살아있다. 어쩌다 마음의 뿌리가 흔들거리면 부드러운 흙으로 북을 돋우어 여무지게 다독인다. 어머니가 떠난 빈자리에 파릇파릇하게 새순을 피우듯. 허정란 수필가·독서논술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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