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20) 울산 최초 8000m 도전, ‘검은 귀신’ 마칼루
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20) 울산 최초 8000m 도전, ‘검은 귀신’ 마칼루
  • 경남일보
  • 승인 2020.05.10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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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청산악우회 단일팀 세계 5위봉 원정
“울산에서 최초로 8,000m 산에 대한 도전이었다. 정상에 오르겠다는 대원들의 의지는 매우 높았다. 그러나 원정에 필요한 화물을 배로 보냈지만 약속한 날짜에 도착하지 않았다. 악천후로 인한 대형 눈사태는 모든 것을 앗아갔다. 심지어 대원들의 등반 의지까지….”-김관준 대장.
가파른 빙벽지대를 돌파하고 있는 대원

자연이 만든 완벽한 피라미드 ‘마칼루(8463m)’. 산악인들은 세계 5위봉 마칼루를 이렇게 부른다. 네팔 현지인들은 마칼루의 위압적인 모습을 ‘검은 귀신’으로 표현하고 있다. 
1990년 울산 최초로 8,000m급 자이언트 산을 등정하기 위한 원정대가 네팔로 떠났다. 등반 대상 산은 바로 마칼루였다. 그해 여름 ‘90한국마칼루울산원정대’는 김관준 대장, 이건욱 부대장, 이상호 등반대장, 박규호, 김영태, 신영호, 김미애, 황두환 대원이 참여했다. 마칼루는 1982년 허영호가 한국인 최초로 남동릉을 통해 정상에 올랐다. 울산 산악인들은 허영호가 오른 남등릉을 따라 등정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봄 시즌이 아닌 등반하기 어렵다는 가을 시즌으로 정했다. 원정대는 등반 자료와 사진 등 각종 자료를 통해 전체적인 루트에 대한 정보를 파악했다.
가을 시즌 세계 최초 등정 노려
‘검은 귀신’으로 불리는 마칼루 동남릉은 넓고 폭넓은 아이스폴이 형성되어 있고 고도가 높을수록 대원들을 날려버릴 만큼 강력한 제트기류가 대원들을 위협했다. 또 정상까지 가기 위해서는 캠프를 6개 남짓 건설할 정도로 등반 구간도 길어 대원들은 강한 체력과 날씨, 시간과 싸움을 벌여야 하는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다.
1990년 8월 13일 네팔 카트만두에 도착한 원정대는 정광식씨가 운영하던 빌라 에베레스트에 여장을 풀었다. 원정대는 네팔 관광성에 등반에 관한 행정 절차를 진행하며 배편으로 보낸 화물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카트만두 8월 날씨는 거의 매일 하루에 한 번 비가 내렸다. 그러나 하순으로 접어들면서 비 내리는 것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로 접어들고 몬순이 끝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히말라야 등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날씨다. 몬순(monsoon)은 계절풍으로 히말라야는 동서 약 2400㎞에 달하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몬순 영향을 받는다. 대체로 여름 몬순은 6월 중순~ 9월로 많은 비가 내린다. 겨울 몬순은 11월~2월 3개월로 평지에서는 좋은 날씨가 이어진다. 그러나 히말라야 고산지역은 강한 바람이 불어 산악인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
따라서 네팔에서 히말라야 등반을 몬순을 피해 시작하는데 4~5월 몬순이 시작되기 전 프리 몬순, 10~11월 몬순이 끝난 포스트 몬순을 선택한다. 이 기간 맑은 날이 계속되는 등 가장 안정적인 날씨가 이어져 등반하기에 더없이 좋다.
<몬순(monsoon)은 아랍어로 ‘계절’을 뜻하는 ‘머심(mausim)’에서 유래했다. 계절에 따라 6개월마다 바람 방향 남서풍과 북동풍을 의미했으나 히말라야 등반에서는 몬순이라 지칭하고 있다.>
 
 
오지 않는 화물…애타는 마음
몬순이 코앞에 다가왔지만 화물은 도착하지 않았다. 대원들은 거의 매일 네팔 관광성에서 확인했지만 소식이 없었다. 대원들은 초조하기 시작했다. 원정대는 빌라 에베레스트에서 사정을 설명하고 대구 계명대가 맡긴 장비를 빌렸다. 그리고 이상호 등반대장과 박규호, 김영태 대원 그리고 셰르파가 선발대로 마칼루로 향했다. 천금 같은 시간이 흘러 9월로 접어들었다. 베이스캠프에 대기하던 대원들은 식량과 장비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물론 카트만두에 있던 대원들의 속은 더 타들어 가고 있었다. 9월 5일 드디어 그렇게 기다리던 화물이 도착했다. 많은 시간을 뺏긴 그들은 포터를 동원할 경우 사실상 등반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 항공으로 짐을 수송하기로 했다. 포터를 활용할 경우 최소한 1주일 이상 걸리는 카라반을 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헬기 2대로 가장 시급한 식량과 장비를 옮겼다. 하루 만에 짐을 수송한 후발대는 비행기로 룸밍탈까지 이동한 후 도보 카라반으로 베이스캠프로 향했다.
김관준 대장은 이렇게 회상했다. “대원들의 사기는 높았다. 하지만 배편으로 보낸 화물이 늦게 도착하면서 시간이 촉박해지자 대원들은 시간에 쫓겼다. 히말라야 원정에서 일사천리로 진행되지 않고 다음 일정으로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면 대원들의 사기는 꺾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주어진 짧은 시간에 최선을 다하고 다음 일을 빠르게 진행하는 것이 그 상황에서는 최선의 길이었다.”
9월 14일 후발대는 룸 지역에서 포터 70명을 고용해 나머지 식량과 장비를 베이스캠프로 옮겼다. 
마칼루 전경
 
설원지대를 통과하는 대원
선발대, 9월 중순 2캠프 구축
한편 선발대는 9월 3일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후 9월 5일 루트 작업에 나서 9월 8일 1캠프(5400m), 9월 13일 2캠프(6100m)를 구축해 놓은 뒤였다. 
선발대로 참여한 이상호 등반대장은 “마칼루에는 거의 매일 흐리고 강한 바람이 규칙적으로 몰아쳤다. 베이스캠프에 들어온 후 마칼루 정상을 좀처럼 볼 수 없을 정도로 악천후가 계속됐다. 선발대와 셰르파들은 화물이 늦게 도착하면서 시간이 부족해 등반 시간이 줄어들 것에 대비해 정말 열심히 루트를 만들었다. 부족한 식량과 장비,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모든 대원들이 베이스캠프에 모였다. 하지만 날씨가 계속 나빠지면서 대원들은 등반을 할 수 없었고, 먼 산만 바라볼 뿐이었다. 9월 15일 대원들과 셰르파들이 식량과 장비를 운반했고, 다음날 김영태 대원과 셰르파 사다 곰부가 사우스콜 위에 3캠프(6000m)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9월 18일 이상호 등반대장과 사다 곰부 등이 4캠프를 설치하기 위해 고정 자일을 설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4캠프로 가는 구간은 정면으로 불어오는 강력한 맞바람에 실패했다. 특히 4캠프 구간은 탁 트인 리지(ridge)를 계속 걸을 수밖에 없어 온몸으로 바람을 맞아야 했다. 다음날 다시 전진을 시작한 셰르파들이 7200m 지점에 4캠프를 설치했다. 정상 공격을 위한 교두보는 확보했지만 날씨가 좋지 않았다. 원정대원들은 모두 베이스캠프에 모여 그동안 캠프 구축으로 떨어진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원들은 고기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오랜만에 꿀맛 같은 휴식을 취했다. 화물이 늦게 도착하고 기상 악화로 제대로 등반을 하지 못했지만 대원들과 셰르파들은 돈독한 우정을 선보였다. 사다 곰부를 비롯한 셰르파들은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1988년 다울라기리1봉을 등정한 후 한국을 방문한 경험이 있는 사다 곰부는 등반 실력과 따뜻한 인정을 겸비한 셰르파였다. 대원들이 고소를 겪을 때면 한국 경험담을 이야기하며 격려했다.
“서울 올림픽 때 한국을 방문했는데 ‘저소증’으로 며칠을 고생했다.”라고. 
김관준 대장은 1차 공격조로 이상호 등반대장을 지목했다. 김영태 대원에게는 베이스캠프에서 5~6캠프 구간이 직접적인 무전이 안되는 만큼 4캠프로 올라가 등반 과정을 알려달라고 지시했다.
9월 23일 라마제를 올리며 안전을 기원했다. 전 대원들과 셰르파들은 5캠프와 6캠프를 건설에 나섰다. 앞서가던 셰르파들이 캠프가 파손됐다고 무전으로 알려왔다. 그들은 텐트를 재정비하며 9월 26일 4캠프에 도착했다. 
다음날 이상호 등반대장과 김영태 대원은 4캠프로 진출할 계획이었지만 상게 셰르파가 피를 토하며 컨디션이 좋지 않아 3캠프로 되돌아왔다. 원정대는 4캠프 셰르파가 5캠프를 만들 때 3캠프에 있던 이상호, 김영태 대원이 4캠프로 진출해 정상을 공격하는 등 단계적으로 계획을 세웠지만 차질이 빚어졌다. 9월 28일 2캠프에는 지원조인 셰르파 푸리마가, 3캠프에는 이상호 등반대장과 김영태 대원, 4캠프에는 곰부 등 셰르파 3명이 분산해 있었다.
 

9월 27일 저녁 김관준 대장은 캠프에 무전으로 상황을 체크했지만 날씨도 쾌청했고 별 이상이 없었다. 다음날 새벽 5시 베이스캠프는 각 캠프로 교신했다. 4캠프는 교신이 가능했지만 3캠프는 무전 상황이 좋지 않아 간간이 교신했다. 이상호 대원은 긴급하게 상황을 보냈다. “강한 바람이 갑자기 불어닥쳐 텐트가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도저히 버틸 수 없다. 눈이 텐트를 막는 바람에 밖으로 나올 수도, 짐도 챙길 수도 없다.” 
2캠프는 아예 무전이 되지 않았다. 날이 밝아오자 베이스캠프에서 2캠프를 살펴봤다. 순간 대원들은 눈을 의심했다. 텐트가 사라진 것이다. 순간 베이스캠프에서 긴장감이 돌았다. “대형 눈사태가 텐트를 통째로 삼켜버렸을까? 셰르파는 제대로 탈출했을까?”
가까스로 3캠프에서 탈출한 이상호 등반대장은 2캠프로 향했다. 사고 소식을 4캠프에 있던 셰르파들에게 알렸다. 망원경에는 4캠프에서 2캠프로 급하게 내려오는 셰르파들의 모습이 보였다. 대원들과 셰르파들은 2캠프에서 푸리마 셰르파를 구조했다. 대원들과 셰르파들은 탈진했지만 무사히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 원정대는 더 이상 등반은 어렵다고 판단, 철수를 결정했다. 
‘90한국마칼루울산원정대’의 첫 도전은 실패로 끝이 났다. 여기에 원정에 필요한 각종 화물이 늦게 도착하는 불운이 겹쳤다. 이로 인해 대원들의 사기 저하와 대원 분산으로 이어졌고 등반이 늦어져 계절적 요인에 의해 차질을 빚었다. 2캠프를 덮친 눈사태는 지친 대원들과 셰르파들에게 등반 의지를 완전히 꺾고 말았다. 
이상호 대원은 회상했다. “실패 요인은 여러 가지 있었다. 그러나 세계 5위봉이라는 거대한 ‘흰 산’의 첫 경험이 주는 뼈아픈 교훈이었다. 껍데기를 깨는 아픈 경험은 다시 히말라야로 진출하는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날 것이라 믿었다.”
이 등반은 비록 정상에 서지 못했지만 8,000m 등반에서 값진 경험을 했다. 그리고 19년이 지난 2009년 울산 산악인들은 마칼루를 등정하면서 한(恨)을 풀었다.
박명환 경남산악연맹 부회장·경남과학교육원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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