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선생님들
내 인생의 선생님들
  • 경남일보
  • 승인 2020.05.13 14: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송희복 (진주교대 교수)
돌아가신 선생님들 가운데 각별하게 생각나는 선생님들이 늘 내 마음속에 계신다. 내 인생에 적지 아니한 영향을 끼친 세 분의 선생님들이다.

A 선생님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이었고, 3년 내리 국어 선생님이었다. 논리적인 설명 방식은 나에게 지적인 호기심을 충족해 주셨다. 내가 문학평론가로 활동할 수 있게 된 데는 A 선생님의 언술이 모태가 된 것 같다. 한때 가정사의 일로 적잖이 불행했지만, 중년 이후에 기독교에 귀의해 마음의 평화를 찾으셨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부산에서 한 해에 한두 번씩 뵙고 식사와 차를 함께 했다.

B 선생님은 대학을 입학하면서 뵌 학년 지도교수였다. 연세가 비교적 많으셔도 학생들의 생활 분야에 특히 관심을 많이 가지셨다. 전공이 국어학이신 이 분 선생님은 나를 평생토록 한글주의자로 이끄신 분이다. 이 분은 학보사 주간으로 내가 대학 2학년 때 쓴 발표문을 고치게 해 사진과 함께 전면에 실어주었다. 지면이 부족한 그 당시의 사정을 감안하면, 교수에게도 기회가 주어지기가 어려운 파격적인 일이었다. 학교에서도 이러한 수혜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내 스무 살 약관의 나이에 발표된 논문 「문학의 언어철학적 접근」(1977)은 지금 보면 사뭇 부끄러운 논문이지만, 내가 발표한 최초의 논문이었다. 나에게 자신감을 심어준 선생님의 결정은 나를 학문하는 이로 성장시켰다.

C 선생님은 학창 시절에는 교무에 관한 보직 교수로서 일을 하셨기 때문에 학생들과 소원했다. 나는 이 분에 이어서 모교의 교수가 됨으로써 세속적인 신분 상승을 이룰 수가 있었다. 이 분 때문에 내 인생이 바뀌었다. 퇴임하고 동시에 내가 교수가 될 즈음에, 껄껄 웃으시면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자네는 곰 같은 사람이야. 내가 미련하지 않고 약삭빠른 여우였다면, 더 일찍 수도권에서 교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신사적 풍모의 합리주의자이신 C 선생님과 자주 만나면서 10년간 좋은 사제관계를 유지하였다.

연령 차로 보면, A 선생님은 1940년 출생으로 삼촌 같은 분이고, B 선생님은 큰아버지 같은 분이고, 나와 같은 닭의 띠였던 C 선생님은 아버지 같은 분이었다. 세 분 선생들은 내가 신춘문예에 세 분야에 걸쳐 4선(選)을 하는 과정에서, 저서를 하나하나 낼 때마다, 늦은 나이에 장가를 들 무렵에 이르러 큰 내색은 하지 않아도 마치 가족의 일원처럼 기뻐하셨다.

세 분 선생님들은 모두 엘리트 코스를 밟으셨다. A 선생님은 임시수도 부산에서 당시 전국의 수재들이 모였던 경남중학교에 입학해 당시 한강 이남의 명문인 경북대 사범대를 졸업하셨다. 세간에 잘 알려진 유치환, 김춘수의 가르침을 받고 한때 시인이 되려고 했었다. B 선생님은 일제강점기에 경남의 최고 수재들이 모인 진주사범학교(심상과)에 입학, 졸업해 해방 전에 이미 교사가 되었었다. C 선생님은 가난한 성장 환경 속에서도 고학하면서 서울대 사범대를 나왔다. 하지만 이 세 분은 지금의 사정으로 볼 때 그 흔하디흔한 저서 한 권을 남기지 않으셨다. 오로지 교육에만 매진하셨다.

나는 정년을 앞두고 나를 되돌아보곤 한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내 자신이 문인으로서나 학자로서 실패한 삶을 살지 않았다고 본다. 하지만 자인하건대 가르치는 자로서는 성공한 삶을 결코 살지 못했다. 이 사실이 늘 아쉽게 남아 있다. 선생님 세 분을 생각하면, 이 사실로 인해 죄송스러운 생각과 회한이 들기도 한다. 또, 돌아가신 세 분 선생님을 생각할 때마다 그립고도 슬픈 감정이 밀려든다. 인생의 미완성과 유한성 때문일까?
 
송희복 (진주교대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