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쌀
찐쌀
  • 경남일보
  • 승인 2020.05.14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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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대 (수필가)
 

 

물산(物産)도 좋지만 시장은 시끌벅적한 흥정이 제격이다. 간만에 중앙시장에 생기가 넘친다. 사람이 붐비니 새벽바람도 싱그럽다. 오늘도 어물전 모퉁이 구석자리에는 해묵은 무명 자루를 곁에 둔 할머니가 찐쌀을 판다. 바쁘게 오가는 장꾼들을 시나브로 올려다보다가도 눈길이 마주치면 반색을 하며 손짓을 한다. 할머니 장(場)살림은 단출하다. 낡고 물 빠진 감색 보자기를 펴놓은 곁에 모서리가 떨어져나간 나무됫박 두 개와 찐쌀 한 자루가 전부다. 나무됫박에 담아내는 양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가늠도 어렵고 또 굳이 가늠할 필요도 없이 할머니가 주는 대로 받아 간다. 셈법이 복잡치 않거니와 됫박에 안다미로 담아내는 할머니 됫박질 솜씨를 보면 조금 더 달라고 떼쓰는 게 열없음을 아는 사람은 안다.

보릿고개 힘겨웠던 시절에도 시골 삶은 계절 따라 즐거움이 있었다. 낮은 점점 길어지고 보리나 밀도 여물지 않아 군것질꺼리도 없어지면 묵은 보리 찧어 나온 등겨에 양잿물 냄새 물씬 나는 소다를 넣고 보리개떡을 쪄먹었다. 그마저 없는 집 아이들은 볍씨를 고르고 남은 쭉정이로 만든 찐쌀을 기다리며 해긴 봄날을 보냈다. 씨가 곧 한해 농사라 튼실한 것은 모판에 뿌리고, 남은 쭉정이는 물에 불린 후 가마솥에 물을 붓고 채반을 걸친 다음 그 위에 쭉정이를 쪄 말려서 절구에 찧고 껍질을 벗겨 찐쌀을 만들었다. 모내기 때 모가 모자라지 않도록 충분한 양의 볍씨를 담그다 보니 정작 모판에 볍씨를 뿌리고 나면 물에 불린 남은 볍씨도 찐쌀에 보탰다.

찐쌀은 딱딱하지만 입에 넣고 침이 고일 때까지 불리고 씹으면 달콤하고 고소했다. 등교 길에 호주머니 가득 넣은 이를 부러워했고 혹시 한 줌이라도 얻어먹을까 책 보따리를 들어주는 아이도 있었다. 찐쌀은 날씨에 매달려 농사짓던 시절, 추석이 다가와도 기후 탓으로 햅쌀 수확이 어려울 때 익지 않은 물벼를 쪄서 만든 데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장터 할머니가 무시로 들고 나오듯 지금은 시장이나 마트에도 상품화된 찐쌀을 판다. 쪄서 가공하면 벌레도 나지 않고 저장도 오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성한 쌀로 만든 것은 옛날 쭉정이 찐쌀과 색깔은 비슷하나 입에 넣고 굴리면 느껴지는 고소함은 확실히 덜하다. 모판을 만드는 것은 농사꾼에게 한 해 길잡이다. 지구 온난화 탓인지 재배기술 발달 덕인지 나락 씨 뿌리는 시기도 많이 빨라졌다. 농부는 한해를 기대하며 부지런히 모판을 준비한다. 한동안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사람 간 멀어짐이 할머니의 넉넉한 찐쌀 한 됫박으로 말끔히 해소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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