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히말라아 (21) 1991 울산팀 가셔브롬2 등정
신들의 정원 히말라아 (21) 1991 울산팀 가셔브롬2 등정
  • 경남일보
  • 승인 2020.05.17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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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산’ 울산원정대 8000m 첫 기록

열정·꿈 품고 출발했지만, 어긋나는 행정·무심한 폭설
계획 변경·거침없는 전진…등반 25일만에 초고속 등정
정상에 선 한영준(사진 오른쪽)과 장상기 대원
1991년 5월 17일 한 원정대가 울산을 떠나 파키스탄으로 향했다. 원래 히말라야 원정은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하다. 먼저 하얀 산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과 꿈에도 그리던 자신의 목표를 향해 올라갈 수 있다는 설렘이 그것이다. 이 기대와 설렘은 동료가, 때로는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뛰어넘기 때문에 산악인들은 히말라야로 향하는 것이다.

모든 원정은 떠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 너무 힘이 든다. 1억 원 전후로 드는 비용이 가장 큰 문제다. 그리고 장기간 자리를 비우면서 대부분 직장도 그만두어야 한다. 비용과 직장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숱한 날들을 고민해야 한다. 비용 등 각종 문제가 해결됐던 그렇지 않던 히말라야로 향하는 비행기가 한국을 이륙하는 그 순간 깨닫는다. 그리고 감탄사를 내뱉는다. “아! 이제 진짜 떠나는구나!”



하얀 산을 위하여…카라코람으로

원정대가 한국을 떠나는 날 가족들과 동료들은 걱정과 부러움으로 공항에서 배웅을 하게 된다. 그러나 1991년 파키스탄 가셔브롬2봉으로 떠나는 원정대는 조촐했다. 그들을 배웅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원정을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로 복잡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배낭에 산에 대한 열정과 8000m 등정이라는 거대한 꿈을 담고 있었다. 5월 23일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했지만 행정 절차를 밟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먼저 도착한 성균관대학교 산악부가 가셔브롬2봉으로 떠나는 것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만 봐야 했다. 국내에서 보내기로 한 원정경비 일부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원들은 예민해졌다. 계획대로라면 카라반을 시작해야 하는 시기였지만 그렇지 못한 원정대 분위기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파키스탄에 도착한 지 거의 한 달이 다된 6월 7일 겨우 이슬라마바드를 떠나 카라반 요충지인 스카루드로 떠날 수 있었다.

가셔브롬2봉을 등반하기 위해서는 이슬라마바드~스카르두를 버스로 이동한 후 스카르두~아스콜리까지는 지프로 카라반을 시작한다. 아스콜리에서 걷기 시작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파유를 지나 세계에서 가장 긴 발토르 빙하를 따라 1주일 이상을 걸어야 베이스캠프에 도착하게 된다. 이 등반 루트는 1880년대 파키스탄 카라코롬 정찰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원정대는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기 때문에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가셔브롬2봉 위치도 - 복사본


5400m 간다고도 패스를 넘다

6월 12일 송정두 대장을 비롯한 대원들은 대모험을 감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들은 카라반 기간을 최대한 줄일 수 있는 힘든 루트를 선택했다.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원정대는 동남쪽에 위치한 후세마을로 카라반을 시작하면 5일 정도 일정을 단축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후세마을로 향하는 카라반 최대 장애는 5400m에 달하는 간다고도 패스(고개)를 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100명이 넘는 포터들이 25㎏ 짐을 지고 이 고대를 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포터들에게 이 높이는 카라반 자체가 등반인 셈이었다. 자칫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다. 실제로 파키스탄 포터들은 3000m 지대에서 살고 있지만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되는 5~6월 시즌 카라코람에 위치한 K2(8611m), 브로드피크(8047m), 가셔브롬1봉(8065m) 짐을 나르고 있다. 이 고산들의 베이스캠프는 모두 5000m 이상의 높은 곳에 있어 시즌 초반 고소 적응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목숨을 잃는 경우가 종종 있다.

원정대는 카라반 루트를 스카루드~마쭐루~후세~세이쵸~간도고도 베이스~달산파~간도고도 하이캠프~간도고도 고개~샤그린~발토르 빙하~베이스캠프로 잡았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했다. 원정대와 포터들은 간도고도 하이캠프에 도착했지만 그들을 맞이한 것은 바로 폭설이었다. 원정대는 6일간 발이 묶였다. 날씨가 좋아지자 카라반을 시작한 원정대는 6월 26일 베이스캠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등반 루트


6월 말 외국 원정대 보다 늦게 BC 도착

마음이 급해진 원정대는 하루 휴식을 갖고 곧바로 등반에 나서 1캠프(5600m)를 구축했다. 원정대가 바로 등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간도고도 패스를 넘으면서 고소 적응을 완벽하게 했기 때문이다. 조금 시간이 걸린 카라반이 오히려 등반에 도움을 준 것이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원정대는 5300m에 전진 베이스를 설치하고 활발한 등반을 하고 있었다.

7월 2일 2캠프(6300m)를 건설하기 위해 나섰다. 대원들은 바나나 리지 구간에서 루트 작업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1~2캠프 구간은 경사가 60도 정도의 지루한 설벽과 빙벽이 섞여 있어 가장 힘든 곳이다. 마침 성균관대학교 산악부가 4캠프를 설치하고 내려오는 길에 마주쳤다. 대원들은 그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대원들은 2캠프 루트를 만드느라 파김치가 될 정도였다. 날씨는 나빠져 가셔브롬 산군이 눈보라에 휩싸였다. 이미 3~4캠프를 설치한 다른 원정대는 휴식을 취하며 체력을 비축했다. 그러나 울산 원정대는 등반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악천후를 무릅쓰고 20㎏이 넘는 식량과 장비를 부지런히 옮겼다. 이 과정에서 체력적으로 많은 힘이 들었지만 고소 적응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부서진 텐트 2캠프


7월 19일 마지막 4캠프 설치

7월 15일 날씨가 좋아지자 3캠프(6800m)를 건설하고 2캠프로 물러났다. 7월 18일 5명의 대원들은 3캠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4캠프(7350m)를 공략했다. 이 구간은 가파른 암벽과 빙벽, 설벽에 6㎜ 고정 로프를 설치하기 위해 9시간 사투 끝에 4캠프를 설치했다. 정상으로 가는 마지막 참호를 구축했다. 울산팀이 4캠프로 올라온 날 성균관대 산악부는 새벽 4시 강한 바람을 뚫고 정상 공격에 나섰다. 성대팀은 1차 등정에 실패한 상황이라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7월 19일 낮 12시 성균관대 대원 4명은 등반 8시간 만에 전원 정상에 섰다. 울산팀들은 4캠프에서 하산하는 성대팀에게 축하 인사와 따뜻한 차 한잔을 건넸다. 대원들 가슴에는 부러움과 설렘이 교차했다.

간단히 저녁을 먹은 대원들은 베이스캠프에 있는 대장과 교신했다. “4캠프에 있는 전 대원 컨디션은 아주 좋습니다. 오버. 내일 날씨가 좋으면 정상 공격을 시도할 계획입니다. 오버.”

베이스캠프에서 답장이 늦어졌다. 송정두 대장은 섣불리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대원들은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4캠프에 있던 대원들은 모두 히말라야 고소 경험이 없었다. 베이스캠프에 늦게 도착했고, 4캠프에 도착한 다음 날 곧바로 정상으로 향하는 것이 과연 이들이 견뎌낼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했다. 솔직히 등정의 기쁨을 생각하기보다는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많았다.”

“살아올 수 있는 대원들만 정상으로 가라.”

송정두 대장은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살아 돌아올 수 있는 대원만 정상으로 출발하라.”

대장의 뜻밖의 대답에 대원들은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대원들은 대장의 속 깊은 마음을 알고 비장하게 각오를 다졌다. 죽음의 지대 8000m에서 등반이 얼마나 위험하며, 자칫 살아 돌아올 수 없는 마지막 등반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가셔브롬2봉 정상에 선 박을규 대원
7월 20일 새벽 2시. 강한 바람이 4캠프에 몰아쳤다. 대원들은 망설였다. 시간은 흘러 새벽 4시 30분이 지나자 대원들은 일단 출발하기로 했다. 이용순·조재철 대원, 장상기·한영준·박을규 대원이 조를 맞춰 텐트를 나섰다. 조재철 대원은 늦게 합류했지만 뛰어난 고소 적응과 등반력으로 등정조에 포함됐다. 그들은 일단 출발한 후 날씨가 좋지 않으면 4캠프로 돌아와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등반 5시간이 지났지만 바람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칫하면 바람과 함께 3000m 절벽으로 날려갈 수도 있어 대원들은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대원들에게 몰아치는 세찬 바람은 호흡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두세 걸음 떼고, 가쁜 숨을 바람 때문에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오전 9시 20분 차이나 골짜기에 도착했다. 저 멀리 중국지역에 있는 산군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짓말같이 바람이 잦아들었다. 이제 고요함만이 남았다. 대원들이 착용한 크램폰과 눈이 부닥치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차이나 골짜기를 벗어난 대원들은 거침없이 전진하며 정상으로 향했다. 7월 20일 낮 12시 50분 8035m 가셔브롬2봉 정상에 섰다. 그들은 K2, 가셔브롬1봉 등 장엄한 8000m 자이언트 봉우리를 둘러봤다. 대원들은 정상에서 기쁨을 만끽하고 등정 사진과 영상을 촬영하며 하산을 서둘렀다.

모든 대원들이 탈진해 하산은 쉽지 않았다. 암벽과 설벽 혼합지대에서 박을규 대원이 추락했지만 다른 대원들이 확보하면서 추락을 막았다. 대원들은 한숨을 돌린 후 최대한 천천히, 그리고 안전하게 하산했다. 지친 대원들은 오후 6시가 되어서야 4캠프에 도착했다. 그들은 성균관대 산악부 한상국 대장과 김수홍 대원이 추락하면서 떨어뜨린 피켈을 주워 하산했다.

‘91한국울산가셔브롬2봉’ 원정대는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후 25일 만에 5명 대원이 등정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들은 단순히 8000m 등정이 아니라 울산지역 최초 8000m 등정을 이뤄낸 것이다. 그것도 5명의 대원이 정상을 밟는 영광을 안고 귀국했다. 그들의 출발은 미약했지만 돌아오는 길은 화려했다.

박명환 경남산악연맹 부회장·경남과학교육원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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