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과 광장(廣場)
골목과 광장(廣場)
  • 경남일보
  • 승인 2020.06.18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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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대 (수필가)
 

 

계절 따라 연분홍 살구꽃이나 녹음 짙은 감나무가 한가로이 담장 밖을 내다보는 골목길은 수더분하다. 깜장고무신에 갈래머리를 한 누이가 사립문 틈으로 고양이 쫓는 강아지 찾아 금방이라도 달려 나올 듯하다. 이른 새벽 산으로 나무하러 가신 어르신이 짚신 끌며 한가득 등걸 짐 지고 고샅길로 접어 드실 것이다. 갓 자란 상추 한 소쿠리에 생멸치 졸임 반찬을 든 새댁은 큰집 발걸음으로 바쁘다. 돌담 굽이 돈 맨 끝집, 부지런한 영감님이 아침마다 쓸어댄 곳은 티끌 하나 없이 정갈하다. 골목은 정(情)이자 어울림 문화다.

돌담 사이로 어둑어둑 흐르는 호롱불빛에도 마실 다니던 어머니 돌부리 걸리신 적이 없었고 공부길 떠나는 아들에게 눈물 보일까봐 하얀 새벽달 뜬 골목길 차마 벗어나지 못했다. 골목은 웃음 길이자 울음 길이었으며 잔치 끝 뒤풀이 음식이 오가고 시집간 딸이 해온 자랑꺼리가 펼쳐지던 곳이기도 했다. 어스름 초승달이 걸리면 소슬바람에 겁먹은 강아지 흔들리는 대나무 가지보고 짖으며 나갔다 머쓱하게 돌아들었다. 어린 시절 삶은 골목에서 시작되었다. 햇볕이 따스한 골목에서 놀이와 경쟁을 했고 닭과 강아지를 쫓으며 세상으로 나아갔다. 어른들은 골목을 만들었고 골목은 아이들을 키웠다. 처마를 맞댄 골목은 갈등이 아닌 정이 묻어났다.

언젠가 외국의 열린 광장이 부러운 적이 있었다. 서양문화는 광장문화다. 로마시대의 포럼(Forum)에서 유래된 광장은 시민들이 모여서 자유롭게 토론하는 공공 연설장소를 의미한다. 사실 로마는 일부 지배계층이 다수의 로마시민을 지배하는 귀족 중심 문화이자 남자들만의 문화였다. 힘 있는 권세가들이 그곳에서 웅변으로 추종세력을 형성하고 정치조직을 만들었다. 로마문화를 기반으로 한 유럽의 광장에는 국가를 세웠거나 전쟁에서 승리한 역사적 인물의 청동기마상이 많다. 자유토론에서 출발한 광장이 지금은 세계를 향한 관광과 나라홍보 수단화 되었다. 반면 유교적 질서를 근간으로 우리 선조들은 정(情)과 나눔의 골목문화를 이어왔다. 열린 광장은 없었다. 광화문 광장을 만든다할 때 세종대왕과 충무공 동상이 있는 그곳이 기념비적 문무(文武)역사를 넘어 소통과 화합, 세계를 향한 관문이 되리라 기대했다. 꿈이었다. 낡아빠진 이념과 잘못된 정치적 신념, 이기주의가 충돌하는 진흙탕이 된지 오래다. 골목보다 못한 광장을 보는 것은 서글프다. 세계인들이 부러워할 우리광장은 언제쯤 만들어질까. 지금까지 없었던 거여(巨與)국회에서는 더 이상 민의(民意)가 광장에서 분출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이덕대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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