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26)디란 피크, 5년 만에 빛난 울산의 눈물
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26)디란 피크, 5년 만에 빛난 울산의 눈물
  • 경남일보
  • 승인 2020.06.21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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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원정대 정성도 대원 정상 등정 쾌거
1989년 하상원·이수희 대원 실종 추모 등반
 
디란 피크 원정 팸플릿

“1989년 디란 원정에 때 눈사태로 하상원, 이수희 대원을 잃고 통곡하며 돌아섰다. 가슴 아픈 슬픈 사연을 보낸 지 5년이 지났다.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했고, 그들은 정상에 섰다.”

1989년 울산 산악인들은 디란 피크((Diran peak 7257m) 원정에 나섰다. 5월 25일 베이스캠프(3,300m)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등반을 시작했다. 디란 피크는 ‘흰 봉우리 산’이라는 뜻을 가진 미나핀(Minapin) 피크로도 알려져 있다. 파키스탄 훈자 지역은 우리에게 ‘장수마을’로 잘 알려져 있으며, 뛰어난 풍경으로 유명하다. 훈자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러시 피크(Rush peak 5098m), 서쪽 디란 피크, 남쪽 라카포시(Rakaposhi 7788m), 북쪽 울타르 피크(Ultar peak 7388m)가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1989년 디란의 눈물

디란 피크는 1892년 영국의 탐험가 콘웨이가 남쪽 방면으로 탐험했으며 여러 원정대가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1968년 9월 오스트리아가 초등했다. 디란 피크를 울산산악회 회원들로 구성된 원정대는 정창수 대장(48)을 비롯해 이수희(27)·정윤일(27)·하상원(26)·정성도(26)·정봉화(26) 대원 6명으로 구성됐다. 원정대는 6월 1일 1캠프(4300m)를 설치했지만 폭설로 장비를 잃으면서 등반이 지연됐다. 6월 12일 루트를 변경해 등반을 다시 시도해 6일 만에 2캠프(5100m)를 건설했다. 6월 20일 하상원·이수희 대원은 서릉 아래 스노우 밴드까지 루트를 만들고 2캠프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날 밤 엄청난 규모의 눈사태가 이들의 캠프를 덮쳤다. 6월 21일 아침 베이스캠프를 떠난 대원들은 수색을 벌였지만 두 대원을 찾지 못했다. 원정대는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등반을 포기해야 했다.

본격적인 등반에 나선 대원들

5년 만에 찾은 ‘하얀 산’

와신상담(臥薪嘗膽). 5년이 흘렀다. 1994년 디란 피크 원정대를 다시 결성했다. 김영문 단장을 중심으로 최문환 대장·박성만 부대장·김종기(촬영)·정윤일(행정)·정성도(식량)·박을규(장비)·정한철(수송, 재무)·김용군(포장)·김명희(의료) 등 10명으로 구성했다.
원정대는 5월 29일 서울을 출발,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행정 절차를 마친 원정대는 6월 8일 카라반을 시작했다. 6월 11일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5년 전 실종된 그들을 위한 추모 동판을 설치하고 잔을 올렸다. 대원들의 목이 메워왔다. 정윤일 대원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추모 동판 앞에서 말했다. 그대들의 친구, 선배와 후배가 데리러 3년 만에 돌아오겠다고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5년 만에 왔다. 미안한 마음에 가슴이 저렸다.”
6월 15일 루트 정찰과 고소 적응을 시작한 원정대는 17일부터 본격적인 등반에 나섰다. 정윤일·정성도 대원, 박을규·정한철 대원 2개조로 나눠 격일제로 등반했다. 이날 전진캠프(3900m)를 설치한 원정대는 19일 1캠프(4600m), 22일 2캠프(5400m)를 순조롭게 구축했다. 4캠프(6400m)를 설치하면 정상 공격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했다. 6월 28일 박을규·정한철 대원은 4캠프를 만들기 위해 나섰고, 정윤일·정성도 대원은 3캠프에서 휴식을 취했다. 박성만 부대장과 문상철, 김용군 대원이 3캠프로 장비와 식량을 옮기며 지원했다. 

고 하상원(왼쪽), 고 이수희 대원

마음은 급하고…험난한 4캠프

다음날 4캠프 개척에 나선 대원들 앞에 5600m 지점에서 얼음과 눈이 섞여 있는 피나클(pinnacle, 암벽에 뾰족하게 튀어나온 돌기 부분)이 버티고 있었다. 침봉은 모두 4개로 경사가 60~85도로 얼음 위에 약간 눈이 덮인 눈처마가 발달해 있어 매우 위험한 구간이었다. 정윤일·정성도 대원이 약 30m에 불과한 거리를 돌파하는데 1시간 30분이 걸릴 정도였다. 6월의 마지막 날 박을규·정한철 대원이 세 번째 봉우리를 넘어섰고, 비박했다. 7월 1일 정윤일·정성도 대원은 마지막 피나클을 넘어섰다. 순간 그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초등 자료에는 틀림없이 피너클이 4개로 했는데, 많은 눈이 내리면서 5개의 피나클이 더 형성되어 있었다. 많은 시간이 걸려 통과했지만 4캠프 예정지까지는 700m를 더 올라가야 했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면서 5800m 지점에 도착했다. 8m 정도의 오버행 빙벽과 가파른 설사면이 잇따라 나오자 아이스하켄을 설치하면서 2시간 만에 넘었다. 디란 피크 주변은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저녁 7시 예정보다 300m 아래인 6100m에 4캠프를 만들었다. 
등반루트

정상 앞두고 만난 폭설

7월 3일 눈을 뜬 대원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만 지나면 등반을 마칠 수 있다는 것만이 그들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새벽 4시 40분 마지막 캠프를 떠났다. 베이스캠프에 있던 김영문 단장을 비롯한 나머지 대원들은 정상 공격조가 보내올 무전기에 시선이 쏠렸다. 정상 공격조는 휴식 시간을 이용해 베이스캠프에 무전을 주고 받았다.
“현재 위치에서 2시간 정도 오르면 정상에 도달할 것 같다. 이상.” 베이스캠프에서 알려줬다. 그러자 공격조는 답했다. “눈이 많고, 크레바스도 걸림돌이 되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다만 정상에 눈보라를 잔뜩 머금은 회오리 바람이 불고 있다. 오버.”
7월 3일 낮 12시 대원들이 7100m를 넘어서고 정상을 150m 정도 남겨둔 상황에서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졌다. 강풍을 동반한 천둥과 번개, 그리고 폭설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다급한 목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흘렀다.
“여기는 공격조, 대장님 나오세요.” 
“공격조, 말하라. 오버.”
“현재 앞을 전혀 볼 수 없습니다. 폭설로 전진이 불가능합니다. 오버.” 짧은 침묵이 흘렀다. 
“공격조는 철수하라, 내일을 기약하자. 교신 끝.”
순간 베이스캠프에서는 한숨이 나왔다. “카라반을 시작할 때부터 8일 동안 눈과 비가 내렸다. 그리고 6월 16일부터 계속 날씨가 좋았다. 그런데 하필 정상 공격하는 날 천둥 번개에 폭설까지 내렸다. 우리는 진정 디란과 인연이 없는가?”
천둥과 번개는 4시간 가까이 계속됐다. 베이스캠프와 2캠프에서 머물던 대원들은 울분을 삼켜야 했다.

6월 20일 2캠프 설치를 위해 설원을 지나는 대원들
 
1994년 7월 9일 디란 정상에 선 정성도 대원

눈물 삼키며 2보 후퇴

최문환 대장은 “당시 2캠프에는 비가 내렸다. 텐트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울분을 삼켰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냥 대원들이 무사히 하산할 수 있도록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정상 공격조는 눈물을 머금고 하산을 시작했다. 어둠이 깔렸다. 이제 대원들은 목숨을 걸고 내려가야 할 최악의 상황이었다. 4명의 대원은 2명씩 로프를 묶고 어둠을 헤매며 조심스럽게 하산길을 찾았다. 달빛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사라진 발자국을 따라 내려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칫 발을 잘못 디뎠을 경우 추락하는 최악의 상황도 그들을 움츠리게 했다. 결국 하산을 멈췄다. 대원들은 더 이상 움직이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 설동을 파고 비박하기로 했다. 젖은 장갑과 양말은 그들의 체온을 떨어뜨렸고, 움직임을 느리게 만들었다. 박을규 대원은 “고소모를 쓰고 있었는데도 머리카락이 타는 듯한 통증이 왔다. 손발도 저렸다. 알고 보니 번개에 감전된 것이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설동을 파고 있을 때 번개가 치는 짧은 순간 옆을 둘러봤다. 얼핏 보니 고정 로프가 보였다. 4캠프 위 어려운 구간에 설치한 마지막 로프였다. 정말 기적이었다.”고 회상했다.
설동 파던 것을 중단한 대원들은 로프를 이용해 하강을 시작했다. 베이스캠프와 2캠프 대원들은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벌써 4시간째 통신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디란 피크 정상 주변은 천둥, 번개, 폭설, 구름에 둘러싸여 마치 전장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특히 번개가 등반 루트 가까이 떨어지면서 디란 피크를 뒤흔들고 있었다. “과연 대원들은 무사할까?” 대원들의 걱정은 더해만 갔다.


천둥과 번개를 뚫고 BC로

오후 5시쯤 2캠프에서 베이스캠프로 무전이 날아왔다. 최문환 대장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여기는 베이스, 2캠프, 2캠프 말하라.” 
“대장님! 능선에 대원들이 보입니다.” 짧은 무전은 대원들을 전율시켰다. 최문환 대장은 순간 현기증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젠 살았다. 됐다.”
전 대원들이 베이스캠프로 귀환하고 휴식으로 체력을 보강했다. 7월 8일 2차 공격을 위해 박성만 부대장, 정성도·정윤일 대원이 2캠프에서 4캠프로 출발했다. 피나클을 넘고 오르내리며 2시간 만에 통과하고 오버행 빙벽을 주마로 힘겹게 통과했다. 그날 저녁 7시 마지막 캠프에 도착했다. 텐트는 폭설과 강풍에 처참하게 파괴됐다. 눈에 덮여 절반 정도가 무너졌고, 안에는 녹은 물이 고여 있었다. 코펠로 물을 퍼내고, 텐트를 겨우 복구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내일 있을 정상 등반에 대비했다. 

먼저 간 친구를 위한 힘찬 전진

7월 9일 자정에 일어나 2시에 출발하기로 베이스캠프와 협의했다. 9일 새벽 2시. 맑은 하늘에는 별들이 초롱초롱 빛났다. 박성만 부대장과 정성도, 정윤일 대원은 안자일렌을 하고 정상 공격에 나섰다. 처음에는 추웠다. 시간이 지나고 해가 뜨면서 차가운 냉기가 점차 사라졌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눈은 자꾸만 감겼다. 체력도 떨어지고 있었다. 오후 1시 30분 박 부대장과 정성도 대원은 7000m 커니스를 지나 경사가 완만한 설원으로 접어들었다. 박 부대장은 7100m 지점에서 배낭을 벗고 무전기, 카메라, 간식만 챙기고 전진했다. 오후 2시 7200m 부근 넓고 평평한 설원지대에 도착했다. 이제 정상까지는 50m 미터 정도 남겨 놓은 상황이었다. 박 부대장은 자신의 몸에 이상을 느꼈다. 박 부대장은 이렇게 기억했다. “갑자기 몸이 저렸다. 처음에는 특정 부위에서만 그랬는데 시간이 좀 지나자 온 몸에 이상을 느꼈다. 큰일이다 싶었다. 더 등반할 경우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 같아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정성도 대원 홀로 정상으로…여기는 정상

정성도 대원은 이 사실을 김영문 단장에게 보고했다. 김 단장은 박 부대장과 연결된 자일을 풀고 혼자 정상을 향해 가라고 지시했다. 그는 박 부대장에게 오후 3시까지 돌아오겠다며 정상을 향해 나아갔다. 잠시 오르자 능선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성도 대원은 자신을 위로했다. “저 능선만 넘으면 정상이라는 생각에 피켈에 힘을 주고, 아이젠으로 힘껏 눈을 박찼다. 그런데 앞에 또 다른 봉우리가 나타났다. 힘이 쫙 빠졌다. 저 능선에 오른 뒤 정상이 아니면 돌아서겠다고 마음먹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정성도 대원은 젖먹던 힘까지 쏟아내며 능선에 오르는 순간, 탁 트인 넓은 설원이 보였다. 저 멀리 구름에 가려진 낭가파르바트가, 반대편에는 길기트 지역이 보였다. 정상이었다. 정성도 대원은 마지막 힘을 내 디란 피크 꼭대기에 섰다. 그는 감회에 젖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그는 베이스캠프에 무전을 보냈다.
“여기는 공격조. 정상입니다. 현재 시각 2시 58분. 제 주위에는 이보다 더 높은 봉우리는 없습니다.”
순간 베이스캠프에서 환호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들려왔다. 김영문 단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수고했다. 조심해서 천천히 하산해주기 바란다. 절대 서두르지 말고 무사히 내려오도록.”
정성도 대원은 간단하게 사진을 찍고 하산을 서둘렀다. 시계는 3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오후 4시 30분 정상 밑에서 기다리던 박 부대장, 다른 대원들과 합류해 밤 10시 30분 4캠프에 무사히 도착했다. 1989년 쓰라린 실패를 겪었던 울산의 산악인들은 5년 후 다시 디란을 찾아 그 정상에 섰다. 2명의 악우들에게 약속한 정상 등정의 약속을 지켰다.

박명환 경남산악연맹부회장·경남과학교육원 홍보팀장

대원명단
[취지문]

산은 올라오는 자에게만 등정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궁극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도전하는 길이 가장 최선의 방법입니다. 격동하는 세월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미래를 향해 탐구하는 정신으로 산을 타는 것은 인생의 진리를 찾아 적극적인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알피니스트의 순수한 이념입니다. 까까중 머리 때부터 수없이 영남알프스를 오르내렸던 경험이 이제는 히말라야 등반으로 발전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삶의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크고 높은 이상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을 입증하는 듯하여 감회가 큽니다. 본회의 창립 20년을 통털어 회원 모두가 간직하고 있는 소망이자 신앙과 같은 염원은 자연의 극한 속에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도전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산악운동의 근본 목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히말라야의 많은 고봉들 가운데서도 디란을 향한 열정은 남다를 것입니다. 표고차가 4,000m나 되는 악조건과 기나긴 빙하지대. 더구나 89년 6월에 있었던 1차 등반에서 2명의 동료 대원을 눈사태로 말미암아 잃으면서 실패했던 곳이니만큼 디란은 그들에게 대한 위령의 뜻과 재도전의 뜻을 함께 가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수년동안 쌓아온 훈련으로 디란 등반이라는 긴 여정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참된 등반가는 동시에 방황자’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히말라야 준봉을 헤매면서 인생의 궁극을 위해 방황하는 참된 알피니스트가 될 것입니다. 울산지역을 사랑하는 선후배, 악우님들 모두가 어렵게 준비한 이번 원정을 애정어린 눈으로 지켜봐 주시고 격려해 주십시오. 우리는 여러분들의 격려와 성원을 지고 가서 이 고장의 기백을 히말라야 디란 봉 정상에 굳게 심어 우뚝 세우겠습니다.

1994. 5 대한산악연맹경남울산지부 울산산악회 회장 김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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