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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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20.06.25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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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교육계의 별 허만길 박사의 살아온 길(1)
허만길 박사는 살아온 이력으로 보아 반짝이는 교육계의 별이자 문인(시인, 소설가)이다. 1943년 3월 일본 교토부 오큐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1년 4개월만에 조국으로 돌아와 의령군 칠곡면 도산리에서 ‘세 집 외동아들’이라는 별명을 들으며 자랐다. 가난한 가운데 3살때부터 서당에 다니고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후 진주시 진주중학교(7회)에서 어려움을 이겨내며 공부를 했다.

비가 오면 구멍이 송송한 양철 지붕에서 세든 방안으로 물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고난도 시련도 스스로의 인생임을 마음에 새기면서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했다. 중학교 3학년때에 학교 도서관이 처음 생기면서 그는 도서위원장을 맡아 책이 주는 감동을 얻게 되었다.

중학교 졸업 직전 고교 압학 최종 모의시험에서 그는 8학급 470명 가운데서 1등을 하여 졸업식에서는 선생님들의 성금으로 시상하는 영예로운 학업 장려 직원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그는 대학 진학을 전제로 한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을 할 것이냐 국비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하는 고등학교 과정 사범학교에 진학하여 초등학교 교원이 될 것이냐는 진로 문제는 여러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며 고민하여야 했다. 결국 그는 진주사범학교로 진학했다.

이쯤에서 필자와 허 박사와의 관계를 짚어 놓고자 한다. 허 박사가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할 때 필자도 1학년에 입학하여 한 반에 들어가 공부했는데 허 박사가 당시 키가 큰 부반장이었다. 필자는 산청에서 오고 허 박사는 의령에서 온 촌뜨기였다. 그는 특히 국어선생한테 더 신임을 받았던 착실하고 선량한 모범생이었다. 당시 말본 시간이 따로 있어서 선생님의 질문을 받은 허 박사가 대답을 척척해내자 과목 선생님은 “평소 인정 점수룰 몇 점 더 올려주겠어요”하고 칭찬했다. 필자는 그때 인정 점수를 시험지 밖에서도 줄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후의 허 박사 이력에 대해 미리 좀 밝히면 다음과 같다. 시인이요 소설가이고 서울대 교육학 석사, 홍익대 박사, 세계 최연소 중학교 교원 자격증(18세) 취득, 고등학교 교원 자격증 취득(19세), 1971년 ‘복합문학’ 창시, 1968년부터 우리말 사랑운동 전개, 1970년대 우리말 사랑운동 국가 차원 승화 기여, 1990년 최초 정신대 문제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 발표 및 정신대 문제 제기, 1990년 광복후 최초로 상해 임시정부 자리 보존 운동, 현대적 개념의 학교 진로교육 정착 발전 활동, 문교부 연구사(국어과 편수관, 공보관실 연구사), 교육부 국제교류 진흥원 강사, 서울 당곡고등학교장, 이렇게 줄인다.

허 박사가 태어나기 전의 아버지 이야기부터 들어본다. 그의 아버지 허찬도는 1909년 6월 17일 일본이 조선을 강제 합방을 하기 1년 전 의령 칠곡면에서 태어났다. 10살 되던 해 기미년 3,1운동 때는 어른들 속에서 만세를 외쳤다.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는 주재소에 끌려가고 아비지는 몸을 간신히 피했다. 1929년 아버지는 스무살 여름에 부산으로 세상 구경을 갔다. 무료 이발관에 들러 상투머리를 스님 머리처럼 깎았다. 칠곡면에서는 제일 먼저 머리를 잘랐다. 고향 집에 들어서자마자 자른 머리 때문에 저녁을 자시던 할아버지가 던지는 화롯불에 화상을 입어야만 했다.

칠곡면에는 1922년 5월 6일에 개교한 4년제 칠곡공립학교가 있었다. 1926년 3월에 41명의 첫졸업생이 나왔다. 노동 때문에 소학교 입학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야학을 세워달라는 허찬도 등 동네 사람들 요구로 1929년 5월에 야학을 개설했다. 밤마다 할아버지 눈길을 피해 반장이 되어 다니던 그의 아버지는 결국 할아버지 눈에 들키고 말았다. 아버지는 끝내 할아버지를 피해 다니면서 역사 시간을 많이 기다렸다. 야학이 끝나 1931년 5월 2년 6개울 과정을 마치고 수료했다 아버지 허찬도는 우여곡절 끝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일제에 대한 항거의 표시로 아사히 철공소 조선인 화친회 회원들의 동맹파업을 주도하였다. 그는 일본 땅에서 감히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을 했던 것이다. 그것도 오사카의 무기 공장 가동을 공공연히 멈추게 했으니 말이다. 이튿날 새벽 경찰이 들이닥쳤다. 아버지 허찬도는 부지런히, 그들에 잡혀 끌려가다가 전광석화 몸을 빼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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