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 장마
유월 장마
  • 경남일보
  • 승인 2020.06.28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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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란 (수필가)
 

 

어머니의 한 줄 메모는 급하게 받는 전보지 같았다. “오는 대로 저 만산 밭으로 속히 오너라.” 점심도 거른 채 학교에서 돌아오면 부엌 방문 밑에 놓인 글쪽지는 맥 빠지게 했다. 책가방을 던져놓고 잽싸게 달려가야 했다. 마음 같아선 ‘삶은 감자라도 챙겨 먹고 천천히 오라’는, 어머니의 다정한 말을 듣고 싶었다.

장대비는 숨구멍을 터 주었다. 밥숟가락을 놓자마자 한달음에 논밭으로 달려가지 않아도 되었다. 사정도 없이 쏟아지는 비를 두고 어머니는 무심한 하늘을 탓했다. 책가방을 든 형제들이 일손을 도울 날은 공휴일이나 주말뿐이었다. 농사일은 시기를 놓치면 실농한다. 하루에 수십 번 들어도 어머니의 근심을 이해하기에는 아직은 서투른 열네 살 아이였다.

농번기가 지나고 장마가 시작되면 시골은 한가하다. 어머니는 점심시간에 맞춰 삶은 감자를 한 솥씩 내곤 했다. 사카린을 넣어 달콤하고 노릇노릇해진 감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입씩 베물었다. 자식들의 먹는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마른논에 물들어가는 것하고 아이들 입에 밥 들어가는 게’ 제일 기쁘다고 하셨다. 옛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다는 듯.

비가 오는 날이면 바쁜 농사일 하고는 무관하게 세상이 평온했다. 빗소리는 언제 들어도 마음을 잔잔하게 했다. 천둥 번개가 치는 날이면, 들깨 모종을 심던 손길을 멈추고 집으로 들어온다. 우비 삼아 덮었던 비닐을 벗고 젖은 옷을 몰아내지만, 아늑한 여유로움은 소소한 행복감으로 물들었다.

장마철이라 잠시 일손을 놓은 어머니는 큰이모 집에서 가져온 옷 보따리를 풀었다. 틀바느질 소리는 정서적 풍요로움과 함께 안정감을 주었다. 바느질 솜씨가 좋은 어머니는 헌 옷으로 우리들 치마나 원피스를 만들어 입혔다. 노란색 앙고라 스웨터는 손볼 것도 없이 나한테 꼭 맞았다. 주변에서 예쁘다고 하여 아꼈던 기억이 새롭다.

어릴 적 어머니가 가져왔던 옷 보따리는 요술 상자였다. 헌 옷은 우리에게 즐거움과 함께 생광스럽게 입혀졌기에 지금도 옷가지들을 함부로 못 버린다. 나눔의 집이나 재활용 수거함에 넣으면 간단한 일이지만, 옷 정리는 묵혀 둔 마음만큼 싶지 않다. 어려웠던 시절, 헌 옷을 형제들과 돌려 입으며 귀하게 여겼던 때가 그립다.

어머니의 재봉틀 소리가 아련히 들린다. 소나기가 그치고 박꽃이 하얗게 피는 초가지붕 너머로 무지개가 떠 오른다. 맑은 샘물이 솟는 등골 들판이다.

유월 장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어릴 적 풍경을 스케치한다. 비는 내게 편안하고 반가운 언어로 그려진다.

허정란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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