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히말라아 (28) 울산 첫 포베다·칸텡그리, 사선을 넘다
신들의 정원 히말라아 (28) 울산 첫 포베다·칸텡그리, 사선을 넘다
  • 경남일보
  • 승인 2020.07.05 14: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상 정복 그리고…연락두절 7시간 만에 기적의 생환
텐산산맥·카자흐스탄 최고봉 연이은 도전
칸텡그리 등정 기쁨도 잠시 지옥의 하산길 ‘악몽’


 

1994년 포베다.칸텡그리 원정대 팸플릿.

시간과 고도를 초월해 하늘과 맞닿은 곳. 그 정점을 향한 대원들의 염원이 너무나 강하기에 내재하고 있는 울산 산악인의 강인한 저력과 수차례에 걸쳐 이룩한 업적을 바탕으로 ‘94천산산맥 포베다, 칸텡그리 봉을 등정코자 이렇게 원정대를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93년 설악산 장군봉 적벽에서의 1차 훈련을 필두로 저희 대원들은 강한 자만이 오른다는 신념 속에 동계 설악산 골과 능선, 빙벽을 누볐고, 한라산 분화구를 중심으로 추위와 싸워가며 피와 살을 깎아내는 훈련도 감수했습니다. 존경하는 산악 선·후배님 그리고 동호인 여러분! 정상에 오르는 것이 등반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정상은 우리 대원들의 목표입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반되는 모든 일들. 이를 결코 등한시 한다면 목적 달성은 하나의 희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며 대원들과의 인화단결, 자기 희생을 각자 감수할 것을 거듭 다짐합니다. 아울러 지구 최북쪽에 자리잡은 우리들의 대상지 포베다, 칸텡그리 그 특유의 바람과 급변하는 일기, 루트의 험난함을 우리 대원들은 강인한 정신력과 함축된 기술, 건강한 육체로 혼연일체가 되어 등반에 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본 원정대를 위해 성원에 주신 연맹회장님을 비롯한 선·후배님 그리고 동호인 및 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본 원정이 끝날 때까지 끊임없는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1994. 7 ‘94한국울산 포베다, 칸텡그리 원정대 대장 장상기 (취지문)



“우리가 네팔과 파키스탄이 아닌 카자흐스탄으로 정한 가장 큰 이유는 좀 더 폭넓은 등반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텐산 산맥에 대한 정보와 자료를 많은 산악인들에게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원정을 준비하면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돈이 부족해 후원을 받기 위해 많은 사람을 찾아다녔고, 출국을 앞두고 대원들이 입원하는 등 참으로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원정을 떠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도 하나 달랑 들고 등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장상기 대장.

경남산악연맹 울산지부 구조대는 1994년 카자흐스탄 텐산산맥에 위치한 포베다(Pobeda 7439m)·칸텡그리(Kan Tengri 7010m) 도전에 나섰다. ‘승리의 산’ 포베다는 텐산산맥 최고봉이며 칸텡그리는 카자흐스탄 최고봉이다.

울산지부 구조대는 포베다와 칸텡그리 원정을 위해 2년 6개월간의 준비 기간과 훈련을 통해 대원들을 선발했다. 원정대는 설악산과 한라산, 영남 알프스에서 수많은 훈련을 통해 체력과 자신감을 키워왔다. 이들 산은 북극과 가장 가까운 산으로 높이에 비해 엄청난 추위로 인해 산악인들이 꺼리는 산이다. 사실상 울산에서는 처음으로 텐산산맥에 등반을 시도한 것이다. 그동안 울산은 네팔과 파키스탄에서 등반을 시도했지만 카자흐스탄으로 영역을 넓혔다. 장상기 대장을 중심으로 이성한 등반대장·김성철(장비)·신상기(식량)·김종철(촬영)·김형진(장비)·조병래(동아대)가 참여했다.

 
1994년 포베다.칸텡그리 등반루트
1994년 포베다.칸텡그리 원정대원

천국 같은 베이스캠프…대원들 고소증 호소

1994년 7월 12일 한국을 출발한 원정대는 키르기즈스탄 수도 타슈겐트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버스와 대륙간 횡단열차를 타고 22시간을 달려 카자흐스탄 수도 알마티에 도착했다. 원정대는 7월 14일 카리카 베이스캠프(2200m)에 도착했다. 고소적응을 위해 해발 3000m 산들을 트레킹하며 컨디션을 조절했다. 등반에 필요한 식량과 장비, 고소 적응 등이 끝나자 헬기를 이용해 북 이닐첵 베이스캠프(4000m)로 향했다. 그들을 태운 헬기는 북 이닐첵 빙하 위에 착륙했다. 그러나 대원들은 헬기로 이동하면서 고소 적응에 실패했다. 고소증을 호소하며 적응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고소는 시간과 싸움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원들은 컨디션을 찾았다.

칸텡그리 북벽 정찰, 그리고 정상으로

칸텡그리 북벽 루트를 정찰하기 시작했다. 1캠프(4550m)에서 정상까지는 수직에 가까운 바위와 눈으로 뒤덮여 있어 결코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해외 원정대에 처음으로 개방된 칸텡그리 북벽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오로지 몸으로 경험해야 했다. 칸텡그리 북벽은 위풍당당했다. 강한 바람이 몰아치면 접근이 불가능할 정도로 위압적이었다. 7월 18일 본격적인 등반에 나서 20일 1캠프(4550m)를 설치했다. 2캠프는 만만치 않았다. 대원들은 수직의 암벽과 설벽을 몸으로 느끼며 다섯 번에 걸친 노력 끝에 24일 2캠프(5400m)를 설치했다. 27일에는 이번 등반의 최대 고비인 3캠프(5900m)를 건설했다. 사흘 뒤인 7월 30일 오전 6시 30분 이성한 등반대장과 김성철·조병래 대원이 4캠프에서 정상 공격에 나섰다. 한국을 떠나온 지 19일 만에 정상 공격에 나섰다. 정상 공격을 앞두고 베이스캠프에서는 긴장감이 흘렀다. 대원들은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죄 없는 담배만 피워댔다. 정상 공격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병래 대원이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3캠프로 귀환하고 말았다. 나머지 대원들은 당초 오후 6시쯤 정상에 설 것으로 기대했지만 무전기는 조용했다. 긴장감이 돌았다. 대원들은 정상 등정이 늦어지면 하산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베이스캠프에서 기념촬영을 한 대원들
늦은 등정 성공…죽음의 문턱에 서다

오후 8시가 넘자 무전기에서 이성한 등반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공격조. 조금 전 김성철 대원과 함께 정상에 섰다. 바람이 너무 심해 교신 못했다. 지금 하산하고 있다. 이상.”

순간 베이스캠프에서는 환호성이 터졌다. “등반대장! 정말 수고 많았다. 가능하면 빨리, 안전하게 하산해라.” 정상기 대장은 안전을 당부했다. 하지만 우려는 현실로 다가왔다. 어둠 속에서 체력이 떨어진 대원들은 이제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김성철 대원은 지쳐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다. 등정조는 도움을 요청했다. 3캠프에 있던 대원들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지치기는 마찬가지였다. 급박하게 상황이 돌아갔다. 정상기 대장은 3캠프에 무전을 보냈다. “잘 들어라. 지금 힘들겠지만 지금 즉시 텐트와 침낭을 챙겨 4캠프로 가라. 서둘러야 한다. 등정조는 지금 15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지금 죽음의 지대에서 필사의 탈출을 하고 있다. 도와줘야 한다.”

 
정상에서 하강을 준비하는 이성한 대원.
구조에 나선 대원들마저 고립되다

3캠프에 있던 대원들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어둠이 짙게 내린 텐트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자일의 우정을 생각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밤 11시쯤 지원조로 나선 신상기 대원이 무전을 보냈다. “인철이가 체력이 떨어져 뒤에 있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나도 강한 바람에 갇혀 로정 로프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꼼짝 못하고 있다.”

원정대장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신상기!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서 인철이를 기다려라. 만나면 함께 3캠프로 돌아가라. 올라갈 수 있겠나?”

신상기는 답했다. “알겠습니다. 더 이상 올라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현 위치에서 텐트를 설치하고 공격조를 기다려라!” 신상기 대원은 다시 무전을 보냈다. “4캠프에서 병래가 매우 지친 상태로 내려온다. 이상”

대장이 다급하게 무전을 보냈다. “상기야! 병래를 3캠프로 안전하게 하산시켜라. 그리고 너는 남아서 공격조를 기다려라.”

“대장님 내려갈 힘이 없습니다.”

시간은 흘러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더 이상 구조는 불가능했다. 모든 것은 대원들이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정상기 대장은 무전기를 잡았다. “병래는 출발하고, 인철이는 옆에 있는 일본팀에게 구조를 요청해라.” 김성철 대원의 거의 끊어질 듯한 목소리가 무전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정상기 대장은 고함을 질렀다. “성철아 힘을 내라! 구조팀이 너를 위해 올라가고 있다. 계속 위치를 알려줘라. 병래가 주변에서 너를 찾고 있고, 고정 로프가 시작되는 구간에 상기가 텐트를 치고 너를 기다리고 있다. 힘을 내!”

정상기 대장은 다그쳤다. “김성철! 이성한 등반대장은 어디에 있나?”

김성철은 힘없이 답했다. “저보다 뒤에서 내려오고 있었는데 위치는 모르겠습니다.”

새벽 2시 5분. 김성철은 원정대장에게 무전을 보냈다. “대장님! 춥고 힘들어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정상기 대장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성철아! 조금만 참아라. 바로 밑에서 구조팀이 너를 찾고 있다. 정신 바짝 차리고 힘을 내라. 쓰러지면 안된다. 쓰러지면 일어날 수 없다.”

조병래 대원이 무전기로 김성철 대원을 호출했지만 답이 없었다. 바람은 미칠 듯이 불어 칸텡그리를 날려 보낼 기세였다.

일본 원정대, 구조의 손길을 뻗다

한편 일본팀들은 조병래 대원을 앞지르며 전진했다. 칸텡그리에는 강한 바람과 함께 눈까지 내리면서 한 치 앞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설상가상이었다. 그렇게 30분이 흘렀다. 새벽 2시 35분. 일본 구조팀이 김성철 대원을 발견했다. 소식은 곧바로 무전기를 통해 베이스캠프에 알려졌다. “야호! 됐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베이스캠프에 있던 대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상기 대장은 조병래 대원에게 지시했다. “병래야! 일본팀이 성철이를 3캠프로 데리고 오고 있다. 너는 등반대장을 계속 찾아봐라.”

“대장님! 헤드랜턴 불빛도 보이지 않고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더 이상 찾을 방법이 없습니다. 저도 너무 지쳐 탈진 일보 직전입니다.”

“알았다. 3캠프로 하산해라.” 신상기의 다급한 목소리가 무전에서 들려왔다. “김성철 대원이 막 도착했습니다. 매우 탈진한 상태입니다. 걸을 수조차 없습니다. 여기서 충분히 먹이고 휴식을 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정상기 대장은 답했다. “알았다. 최선을 다해 성철이를 보살펴라.”

 
칸텡그리 정상에 선 김성철 대원. 이성한 대원이 촬영했다.
대원들 기적처럼 살아 돌아오다

잠시 후 조병래 대원이 정상기 대장을 급하게 호출했다. “이성한 등반대장을 찾았습니다.” 정상기 대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그게 사실이가? 다시 한번 반복해라.”

“이성한 등반대장을 찾았습니다. 상태는 양호합니다. 김성철 대원을 구조하고 내려오던 일본팀이 먼저 내려오던 등반대장을 찾았다고 합니다.”

시계는 정확히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제 등정 후 하산한다는 말을 남기고 연락이 되지 않은 7시간 만에 소식이 온 것이다. 대원들은 무사히 살아왔다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김종철 대원이 장상기 대장과 감격의 포옹을 했다. “대장님! 이제 됐습니다. 이제 끝났습니다.”

대원들은 회고했다. “정상 등정 후 하산하면서 연락은 되지 않고, 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기상이 악화하면서 정말 어려운 하산길이었다. 대원 모두는 하나의 마음으로 무사 귀환을 빌었다. 실제로 그들은 기적처럼 살아서 돌아왔다. 당시 구조에 많은 도움을 주고 실제로 구조한 일본 원정대에게 감사의 마음을 다시 한번 더 꼭 전하고 싶다. ‘히말라야 원정의 가장 좋은 결과는 같이 간 대원들이 함께 돌아오는 것이다’라는 것을 실감한 원정이었다.”

원정대는 베이스캠프에서 3일간의 휴식을 취하고 곧바로 포베다 등반을 위해 남이닉첵 빙하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다. 그들은 15일간 등반을 계속했지만 6850m까지 진출한 것에 만족하고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박명환 경남산악연맹 부회장·경남과학교육원 홍보팀장

 
포베다 1캠프에서포즈를 취한 장상기 원정대장
[취지문]시간과 고도를 초월해 하늘과 맞닿은 곳.

그 정점을 향한 대원들의 염원이 너무나 강하기에 내재하고 있는 울산 산악인의 강인한 저력과 수차례에 걸쳐 이룩한 업적을 바탕으로 ‘94천산산맥 포베다, 칸텡그리 봉을 등정코자 이렇게 원정대를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93년 설악산 장군봉 적벽에서의 1차 훈련을 필두로 저희 대원들은 강한 자만이 오른다는 신념 속에 동계 설악산 골과 능선, 빙벽을 누볐고, 한라산 분화구를 중심으로 추위와 싸워가며 피와 살을 깎아내는 훈련도 감수했습니다.

존경하는 산악 선·후배님 그리고 동호인 여러분!

정상에 오르는 것이 등반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정상은 우리 대원들의 목표입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반되는 모든 일들. 이를 결코 등한시 한다면 목적 달성은 하나의 희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며 대원들과의 인화단결, 자기 희생을 각자 감수할 것을 거듭 다짐합니다.

아울러 지구 최북쪽에 자리잡은 우리들의 대상지 포베다, 칸텡그리 그 특유의 바람과 급변하는 일기, 루트의 험난함을 우리 대원들은 강인한 정신력과 함축된 기술, 건강한 육체로 혼연일체가 되어 등반에 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본 원정대를 위해 성원에 주신 연맹회장님을 비롯한 선·후배님 그리고 동호인 및 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본 원정이 끝날 때까지 끊임없는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1994. 7

‘94한국울산 포베다, 칸텡그리 원정대 대장 장상기

 
등반을 마친 대원들이 철수하면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포베다 전경
포베다(텐산산맥 주봉)

위도: 42도 02분
경도: 80도 08분

1920년대 소련은 칸텡그리에 대한 조사를 위해 텐산산맥으로 과학자를 포함한 원정대를 파견했다. 원정대는 400m가 더 높은 포베다를 발견하지 못했다. 1936년 동계 칸텡그리 원정대는 정상 등정을 하다 우뚝 솟아있는 돔 형태의 봉우리를 발견했다. 1938년 레타베트 교수 일행이 이 산에 도전했지만 6930m까지 도달한 후 탈진해 동상까지 걸리면서 후퇴하고 말았다. 같은 해 레오니드 굿맨을 중심으로 3명의 대원이 초등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비행기를 이용해 고도를 측정한 결과 7000m에 못미쳤다. 결국 이들의 등정은 의혹이 제기되면서 인정되지 못했다.

1943년 여름 텐산 탐사부대가 항공기를 이용해 측량한 결과 포베다 높이를 7439m로 확인했다. 텐산산맥 최고봉이 칸텡그리에서 포베다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침공을 막아낸 라첵 장군은 텐산산맥 최고봉을 ‘승리의 산’을 의미하는 ‘포베다’로 이름짓자고 제안했고 받아들여졌다.

1956년 소련 산악계의 대부 비탈리 아발라코프가 11명의 대원을 이끌고 등반을 시작했다. 그해 7월 24~8월 14일 21일간 4개 캠프를 설치하며 정상에 섰다. 중국 방향으로는 1977년 초등한 이후 다양한 루트가 개척됐다. 포베다는 접근이 쉽지 않아 원정대가 쉽게 찾지 않는다. 또 등정자에 비해 사망자가 많아 많은 산악인들이 등반을 기피하는 위험한 산으로 악명 높다.

한국은 1992년 수원합동대가 초등했다. 원정대는 8월 2일 1캠프(4300m)로 진출한 후 북서면으로 등반, 다음 날 2캠프(5400m)를 설치했다. 그들은 6개 캠프를 구축하며 11일 마지막 캠프(6800m)에 진출했다. 하루 휴식을 취한 원정대는 13일 오전 9시 30분 7캠프를 출발해 박태원 등반대장과 임영택 대원이 오후 5시 50분 국내 최초로 텐산 최고봉을 등정했다.

 
 
칸텡그리(소련 최고 미봉)

위도: 42도 40분 10초
경도: 80도 16분 43초



칸텡그리는 왕을 뜻하는 ‘Kan’과 영혼을 의미하는 ‘탱그리(Tangri)’가 합쳐진 ‘영혼의 왕’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현지인들은 ‘Kan Too’ 즉 ‘피의 산’이라고 부른다. 석양에 물든 북벽이 마치 피에 물든 산처럼 보여 붙여진 명칭이다. 1929~1931년 우크라이나 포그레베즈키가 이끄는 원정대가 정찰했다. 1931년 9월 북면~서릉을 경유해 초등했다. 남벽은 5200m 지점에서 발생하는 눈사태와 5800~6700m 지대에 이르는 직벽에 가까운 암벽과 설사면을 우회한 후 위험한 리지 구간을 통과해야 한다. 여기에 강력한 바람이 대원들의 목숨을 위협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