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29)경남, 안나푸르나 남벽을 잠재우다
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29)경남, 안나푸르나 남벽을 잠재우다
  • 경남일보
  • 승인 2020.07.13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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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산악연맹, 세계 3대 남벽 도전…한국 초등
박영석 등 유명 산악인 무덤으로 ‘악명’ 높아
 
알프스 3대 북벽(아이거, 그랑드조라스, 마터호른)이 있듯이 히말라야에는 3대 남벽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오르기 힘든 세 곳은 에베레스트 남서벽(8850m)과 로체 남벽(8516m), 그리고 안나푸르나 남벽(8091m)이다. 많은 산악인들이 3대 남벽을 오르기 위해 도전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산악인들도 부지기수다.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 고도차 4000m

안나푸르나 남벽은 에베레스트와 로체에 비해 높이는 훨씬 낮지만 베이스캠프가 낮아 정상까지 표고 차가 거의 4000m에 달해 접근하기가 어렵고 등정이 매우 까다롭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박영석 대장 역시 2011년 안나푸르나 남벽에 새로운 루트를 만들기 위해 도전했다가 실종됐다. 영국의 유명 산악인 알렉스 매킨타이어 역시 1982년 안나푸르나에서 목숨을 잃었다. 1990년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성 산악인 지현옥 역시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1994년 경남산악연맹은 안나푸르나1봉 남벽 원정대를 조직했다. 난공불락의 안나푸르나 남벽을 오르기 위해 박주환 대장을 비롯해 배현철 등반대장·강덕문(행정)·임종범(장비)·박희택(식량)·황동진(수송·포장)·홍재기(수송·포장)·이수호(행정·식량)·김인기(식량)·김재석(기록·의료)·정현규(회계)·이원희(촬영)·박정헌(장비) 대원이 참여했다. 당시 경남을 대표하는 최고의 대원들로 구성했다.

프랑스 원정대, 인류 최초 8000m 등정

안나푸르나는 인류가 최초로 오른 8000m 산이다. 1949년 네팔 왕국이 폐쇄정책을 추진하다 1949년 문호를 개방한 후 세계 각국은 히말라야로 진출했다. 1950년 프랑스는 안나푸르나1봉에 원정대를 파견했다. 6월 3일 모리스 에르조그와 루이 라쉬날은 5캠프를 출발해 오후 2시 8091m 안나푸르나 정상에 섰다. 모리스 에르조그는 등정 후 심각한 동상을 입어 손가락과 발가락을 거의 모두 절단해야 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영국과 이탈리아, 스위스, 미국 등 강력한 국가들을 물리치고 인류 최초로 8000m를 등정하는 영광을 안았다. 프랑스의 안나푸르나 초등은 사전 정찰없이 단 한번 도전으로 등반 18일 만에 이뤄낸 성과로 오늘날까지도 높게 평가받고 있다. 특히 프랑스는 나일론 섬유를 통한 의류 혁명과 두랄루민을 이용한 가벼운 장비를 제작·사용해 성공하면서 ‘나일론 원정대’라는 애칭을 갖기도 했다.

 
 
한국, 91년까지 5회 도전…모두 실패

안나푸르나 남벽은 1970년 영국의 유명 산악인 크리스 보닝턴이 이끄는 영국팀이 보닝턴 루트를 통해 초등했으며 1981년 봄 시즌에 폴란드가, 1981년 가을 시즌에는 일본팀이 성공했다. 한국의 안나푸르나 등반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4년 안나푸르나 남벽을 처음으로 정찰한 후 1982년과 1984년, 1990년, 1991년 5회에 걸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대원 3명과 셰르파 8명이 희생된 비운의 산이다. 한국이 안나푸르나 남벽에 처음으로 도전한 것은 1990년이었으며 6700m 지점에서 포기한 것이 최고 도달점이었다.

경남산악연맹은 안나푸르나1봉 남벽 한국 초등을 위해 보닝턴 루트를 따라 등반하기로 하고 13명의 대원을 선발했다. 원정대는 1993년부터 대원을 선발하고 기술훈련과 하중훈련, 근력훈련, 합숙훈련을 준비하며 1년 넘게 준비했다.

산거머리 공격…포터 임금 난항

그들은 1994년 8월 27일부터 11월 24일까지 90일간의 대장정에 나섰다. 8월 27일 본대는 창원을 떠나 서울~홍콩을 거쳐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행정 절차를 마무리하고 본격적인 카라반에 나섰다. 그러나 출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카라반을 시작하는 카레에서 란드룩까지 가는 구간은 많은 비가 내리면서 도로 곳곳은 무너졌다. 우거진 숲속 곳곳에는 대원들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주가라는 ‘산거머리’였다. 산거머리는 나뭇잎 등에 살면서 대원들이나 포터가 지나가면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는 고약한 놈이다. 대원들의 목과 얼굴, 팔과 다리에는 산거머리의 기습으로 성한 곳이 없을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포터들이 말썽을 일으켰다. 4시간의 협상 끝에 123명의 포터들이 만약에 문제를 일으키면 임금의 절반을 포기하겠다는 각서를 받는 조건으로 그들의 요구를 전부 받아들였다. 그러나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에서 포터 절반이 스트라이크를 일으키며 하산해 버렸다. 결국 나머지 포터들에게 옷과 음식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카라반을 시작했다.

남벽 가까이…최대한 높게 친 베이스캠프

9월 8일 원정대는 간신히 해발 4200m에 임시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다. 9월 16일 14명의 고소포터를 고용해 5100m에 베이스캠프를 다시 만들었다. 길고도 험난한 남벽을 오르기 위해서는 신속하게 식량과 장비를 수송하는 것이 등정에 가장 필수적이다. 원정대는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해 다른 원정대의 1캠프(5300~5400m)보다 약간 아래에 베이스캠프를 최대한 높게 만들었다. BC에 도착한 후 셰르파들이 심한 설사와 구토를 일으켜 결국 2명은 카트만두로 후송시켰다. 날씨도 심상찮았다. 계속되는 폭설은 안나푸르나 전체를 하얗게 뒤덮었다. 눈의 하중을 버티지 못하고 암벽 구간 곳곳에서 ‘쿠르릉, 쿠르릉’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눈사태와 낙석이 쉼 없이 일어났다. 대원들은 안나푸르나 남벽의 거대함과 자연의 거침없는 울부짖음에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원정대는 낙석과 눈사태를 고려해 바위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지대에 1캠프(5500m)를 설치했다. 대원들과 셰르파들은 추석을 앞두고 가능한 많은 식량과 장비를 1캠프로 옮겼다. 배현철 등반대장은 카라반을 하면서 많이 지쳐 있었던 대원들과 셰르파들의 컨디션을 조절하기 위해 분주했다. 9월 20일 추석을 전후해 라마제를 지내고 대원들은 충분히 먹고 휴식을 취했다.

 
암벽 구간을 오르고 있는 대원 뒤편으로 2캠프가 보인다
추석 끝나고 본격적인 등반

9월 21일 본격적인 등반을 시작했다. 대원들은 20㎏이 넘는 배낭을 메고 2캠프 건설에 나섰다. 해발 6200m에 설치하는 2캠프는 1캠프에서 1100m를 올려야 하는 엄청난 구간이었다. 그들은 1200m가 넘는 고정 로프를 깔아가며 전진했다. 2캠프로 가는 구간은 경사가 40~70도 구간 거대한 바위였다. 몬순이 끝나 날씨는 좋았지만 ‘쉬익, 쉬익’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낙석이 대원들의 목숨을 위협했다. 작은 협곡을 따라 올라가는 등반 루트에 낙석이 떨어지면 거의 피할 수 없어 대원들은 긴장의 끈을 늦출 수가 없었다. 경사가 70도가 될 것 같은 거대한 암벽을 100여m 오르자 눈처마가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봄 시즌에는 눈이 많은 곳이지만 가을 시즌에는 바위만 앙상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눈처마를 통과한 후 거대한 크레바스가 있는 설원에 2캠프를 설치했다. 박주환 대장과 배현철 등반대장은 2캠프가 공간이 넓고 가장 안전한 곳으로 판단, 전진 베이스캠프로 전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영국 루트 포기…새로운 루트를 찾다

황동진·박정헌 대원과 셰르파들은 3캠프 작업에 나서는 한편 대원들은 물량을 전진 베이스캠프로 수송했다. 그러나 원정대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1970년 영국팀이 올랐던 루트는 눈이 거의 없어 낙석 위험으로 사실상 등반이 불가능했다. 결국 원정대는 기존 루트에서 새로운 루트로 바꾸기로 했다. 배현철 등반대장은 당시를 회상했다. “영국 원정대가 올랐던 루트에 눈이 사라지면서 사실상 오를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기존 루트 왼쪽에 있는 벽은 거의 수직이었지만 잡을 수 있는 홀드들이 많아 충분히 승산이 있어 보였다. 안나푸르나 남벽에 새로운 루트를 만들어 보자고 생각했다.”

다행히 박정헌 대원과 다와 셰르파가 암벽에 탁월한 실력을 갖고 있었다. 곧바로 실행에 옮겨졌다. 총알처럼 쏟아지는 낙석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헬멧을 쓰고 전진했다. 그들은 3일간 바위에 안전을 확보하며 1000m가 넘는 로프를 설치했다. 9월 26일 해발 6800m에 3캠프가 만들어졌다. 거의 90도에 가까운 빙벽에 2인용과 4인용을 아슬아슬하게 설치했다.

낙석에 2000m 날아간 배낭

다음날 새벽 황동진·박정헌 대원과 다와·밍마·다망 셰르파 5명이 4캠프로 출발했다. 오전 11시쯤 선두에서 전진하던 다와 셰르파가 실수로 돌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낙석은 바위에 걸쳐 놓았던 박정헌의 배낭을 강타했다. 박정헌은 멍하니 배낭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배낭은 2000m가 넘게 굴러떨어졌다. 배낭에는 카메라와 우모복, 식량, 그리고 정상에서 사진 촬영할 태극기와 경남산악연맹 기(旗)가 들어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발길을 돌리던 대원들은 3캠프에서 잃어버렸던 태극기와 연맹기를 발견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정상에서 찍으라고 보내준 하늘의 선물처럼 보였다.

박주환 대장을 비롯한 전 대원이 베이스캠프에 모였다. 박 대장은 “앞으로 기온이 떨어지고 날씨가 심상치 않을 것 같다. 전 대원과 셰르파가 식량과 장비를 수송하고 1~2차 공격조를 편성해 정상 공격을 시도할 것이다. 각자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해 달라”고 당부했다.

 
베이스캠프에서 기념촬영
정상 공격 앞두고 식량·장비 수송에 집중

10월 2일 이수호 대원은 3캠프로, 홍재기·임종범·김재석 대원과 셰르파들은 2캠프로 향했다. 다음날 셰르파들이 4캠프 구축을 위해 떠났지만 4캠프에 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임시 텐트를 설치했다. 결국 1차 정상 공격조는 10월 4일 4캠프로 향했고 2차 등정조인 강덕문·정현규·셰르파 3명은 3캠프에 도착했다. 그러나 안나푸르나는 하얀 눈에 휩싸이고 말았다. 눈은 시간이 지나면서 폭설로 변했다. 대원들과 셰르파들은 전원 아래 캠프로 하산했다. 3캠프에는 5명이 엉덩이만 걸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7명이 모여 있었다. 텐트는 돌과 얼음에 맞아 찢어져 만신창이였다. 대원들은 헬멧을 착용해야 할 정도였다. 2인용 캠프 역시 정원 초과로 뜬 눈으로 밤을 보냈다. 1~2차 공격조와 셰르파 10명이 정상을 가기에는 식량과 장비가 턱없이 부족했다.

식량 부족으로 하산한 용기 있는 대원들

결단이 필요했다. 강덕문 대원은 배현철 등반대장에게 보고했다. “당시 정상에 한 명이라도 올리기 위해서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내가 먼저 내려가겠다고 했다. 셰르파들에게 장비를 나눠주었다. 컨디션이 가장 좋았던 박정헌 대원을 제외한 전 대원은 하산할 것을 제안했다.” 그의 의견은 곧바로 받아들여졌다. 10월 5일 다른 대원들은 하산하고 박정헌 대원과 3명의 셰르파들은 위로 향했다. 그들은 7150m 지점에 4인용 텐트를 설치했다. 그러나 눈사태가 예상됨에 따라 100m 아래 안전한 곳으로 내려와 2인용 텐트를 다시 만들었다. 박정헌과 셰르파들은 고정 로프를 설치하며 4캠프 공략에 나섰다. 가을 시즌도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대원들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10월 7일 박정헌 대원과 셰르파 3명은 정상 공격을 위해 2캠프를 떠났다. 3캠프에 있던 2인용 텐트를 걷어 4캠프로 향했다. 그들은 눈앞에 버티고 있는 오버행 빙벽을 왼쪽으로 돌아 바위와 눈으로 뒤덮인 벽을 지났다. 약 700m의 고정 로프가 끝나는 지점에 그들은 2인용 텐트 하나를 설치했다. 다음 날 아침 다와 셰르파가 고글을 분실하고 말았다. 옆 텐트에 소리쳐 봤지만 찾지 못했다. 박정헌 대원은 생각했다. “여기까지 어렵게 왔는데…. 다시 내려가야 하나!” 다행히 떨어진 고글이 텐트 밖에 있던 배낭에 걸려 있었다. 10월 9일 추위와 배고픔으로 겨우 눈을 뜬 박정헌은 오전 8시 출발했다. 먼저 출발한 다와 셰르파 흔적을 따라 오버행의 바위를 힘겹게 넘어서자 5캠프 사이트가 보였고, 해발 7400m에 5캠프를 설치했다. 큰 텐트는 넓고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변했다. 등정조는 내일 공격을 위해 일찍 저녁을 먹고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정상으로 간다는 기쁨과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등정조, 구름을 뚫고 정상으로

10월 10일 새벽 3시 베이스캠프에 있던 박주환 대장과 대원들은 일어나 향을 피우고 안전한 등정을 기원했다. 오전 6시 7400m 5캠프. 박정헌은 우유 한 잔과 과자 부스러기로 아침을 해결하고 텐트를 나섰다. 박정헌과 셰르파들은 길이 80m 자일에 안자일렌하고 정상으로 향했다. 굴비 엮듯이 엮인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앞을 향해서 뿐이었다. 5시간 정도 올라 설원에 도착했다. 저 멀리 정상 부근 봉우리와 마차푸차레가 눈에 들어왔다. 베이스캠프에서 등정조를 망원경으로 관찰하며 루트를 무전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정상은 가끔 몰려오는 구름으로 가늠하기 어려웠다. 배현철 등반대장은 전진 속도가 늦어지면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배현철 등반대장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당시 속도를 감안하면 오후 5시쯤 정상에 설 것 같았다. 등정 후 체력이 떨어지면 5캠프까지 귀환할 수 없을 것 같아 비박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보라고 이야기했다. 최악의 상황을 고려한 조치였다.”

박정헌, 10시간 만에 정상에 서다

박정헌은 침착하게 한발 한발 내디뎠다. 정상을 앞두고 약간 평평한 능선에 이르자 로프가 보였다. 마지막 구간에 급경사가 있었지만 다와 셰르파가 먼저 올라가 확보하면서 통과했다. 오후 4시 15분 능선을 오르자 왼쪽에 정상이 보였다. 다울라기리, 틸리초피크, 닐기리 등 주변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때마침 강한 바람이 불었다. 정상에는 바람 때문에 설 수가 없어 바로 밑에서 등정 사진을 찍었다. 박정헌은 베이스캠프에 정상에 올랐다는 간단한 무전만 보내고 곧바로 하산했다. 많은 체력을 소모한 박정헌과 셰르파 4명은 최대한 안전을 확보하며 하산을 시작했다. 그들은 밤 9시 30분 무사히 5캠프로 하산했다.

베이스캠프에서 들려오던 환호성은 등정자들이 5캠프로 돌아오자 깊은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1994년 경남 산악인들은 세계 3대 남벽 안나푸르나 남벽에 새로운 루트를 내면서 정상에 섰다. 10월 10일 오후 4시 15분 8091m 정상에서 일어난 놀라운 일들이었다.

박명환 경남산악연맹 부회장·경남과학교육원 홍보팀장



 
사천공항에 도착한 원정대원들
[취지문]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 검푸른 하늘로 치솟아 인간의 발자국을 한사코 거부하던 그 안나푸르나에 인간 최고의 창조 행위인 그 등반의 서막을 열려고 합니다. 목표가 있는 삶이 좋아 일상의 나긋함에 안주하지 못하고 머메리즘이라는 선구자의 정신을 쫓아 8000m 거벽 등반에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무상의 행위! 여기서 아무것도 얻어지는 것이 없다. 하지만 산에서 우리는 깨달음을 얻고 삶의 의미를 배워 생의 빈칸을 산과의 교신을 통해 조금씩 교정하고 채워 나가는 한 과정으로 이해할 것입니다. 눕체 동계 초등에 이어 낭가파르바트, 나아가 히말라야 3대 거벽과 8000m급 14좌 완등을 목표로 등산사에서 한국의 명예를 빛낼 수 있는 훌륭한 등반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1994. 8.19

94한국안나푸르나1봉 남벽원정대 대장 박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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