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때문이 아니다
미투 때문이 아니다
  • 경남일보
  • 승인 2020.07.13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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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기 논설위원
안타깝고도 불편한 며칠이었다. 어제 장례식을 마치고 한 줌의 재가 되어 고향 선영으로 돌아간 경남 출신 유력 대선주자의 죽음 때문이었다. 극단적인 선택을 택했다는 점과 이후 전개된 일련의 절차와 반응들이 안타까웠고, 불편했고, 민망했다.

사건이 발생하자 언론은 대체로 ‘안희정·오거돈 이어 박원순까지 … 미투로 쓰러진 자치단체장’이라 표현했다. 집권세력의 정치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정치적 동지를 잃었다는 생각에 ‘자신에게 가혹하고 철저했다’고 정의했다. 그리고 ‘그 뜻을 이어 가겠다’는 현수막을 내걸고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조문행렬을 이어갔다. 고인에 대한 추모의 목소리가 크면 클수록 비극적 선택과 인과관계에 있는 ‘성추행 고소 사건’ 피해 여성의 고통이 정비례한다는 사실을 생각이나 했는지…. 피해자에 대한 미안함이나 사과, 배려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지자들은 성추행으로 고소한 여직원의 신상 털기에 열을 올렸다. ‘펜스룰이 답’이라는 궤변도 등장했다. 본질은 고인이 그토록 주창했던 도덕성과 성인지 감수성, 권력자에 대한 견제·비판기구의 부재가 문제인데도 말이다. 전조는 며칠 앞서 성폭행 죄로 복역 중이던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모친상에 정치권의 조문행렬이 이어지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며 옹호할 때부터 있었다. 도덕과 상식도 진영논리로 작동시키데 공포감을 느낀다.

정치권의 조문행렬은 의미하는바 컸다. 정치인의 비민주적·강압적 권력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제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범죄 가해자의 권력이 여전히 공고함을 보여주는 대표적 행태를 보여준 것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견제할 감시기구가 필요하고, 견고한 기득권의 정치권력에 맞설 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정치권은 여야 할 것 없이 그들만의 철옹성을 구축하고 있다. 피해자와 함께하는 연대의 힘이 절실해졌다. 권력 보다 연대의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움직임이 이제는 희망이 됐다.

패턴화 된 단체장의 권력형 성범죄 사건은 지방자치제도 시행 이후 갈수록 고착화된 무소불위의 권력구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최고 12년 동안 누구도 견제할 수 없는 성역화 된 공간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선출된 권력의 힘은 막강한 인사권과 예산권을 틀어쥐고 탄탄한 독재의 길을 구축한다. 여권이라면 날개를 단 격이다. 공직내부는 인사권 행사로 쉽게 장악되었고, 예속화된 지방의회는 별로 맥 못 추고, 지역 언론은 당근의 힘을 벗어나지 못한지 오래다. 이러한 현상은 특별·광역시나 광역·기초 자치단체 할 것 없이 만연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쯤 되면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런 생각 없이 순응하는 게 유리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늘공’은 언감생심 서슬 퍼런 ‘어공’의 힘에 대들 생각을 할 수 없다. 그러니 집무실과 더 깊숙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관심을 갖지도 않았고, 알아 볼 엄두도 못내 유사한 범죄의 양상이 반복되는 것이다. 반면교사도 없었고, 거리낌도 가지지 않았던 것 같다.

문제는 자치단체장 같은 권력자에 대한 견제와 비판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기구나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이에 대한 고민이 없다는 점이다. 공수처 출범 보다 더 시급한 과제일지도 모른다. 검찰이나 사법 권력은 삼권분립의 큰 틀에서 접근할 수 있겠지만, 선출된 지방자치 권력의 전횡과 남용은 현실적으로 제어하기 힘들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시점이다. 선출된 권력이라도 견제할 감시 기구가 필요한 이유다. 패턴화된 성범죄 예방과 차단뿐 아니라 전반적인 지방정부의 구조적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그렇다. ‘미투’ 때문이 아니다. 성범죄 같은 일탈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중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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