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포럼]검무의 역사와 진주
[경일포럼]검무의 역사와 진주
  • 경남일보
  • 승인 2020.07.14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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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복 (진주교대 교수)
검무와 칼춤은 같은 말이다. 우리의 토박이말인 칼춤이 버젓이 있지만 잘 사용되지 않는다. 칼춤이란 말이 대체로 부정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간헐적으로, 정치판에는 ‘망나니 칼춤’이니 하는 표현도 난무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지금은 서슬이 시퍼런 법무부 장관의 망나니 칼춤에 검찰총장의 목이 위태롭다’ 라는 등의 표현이 가능할 것 같은 시국이다. 이런 걸 볼 때, 검무는 칼춤에 비해 가치중립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검무의 유래는 신라의 황창랑이 추었다는 황창무에서 비롯했다. 고려시대의 문인들의 시에 의하면, 검무가 가면을 쓰고 연출되었음을 나타내는 구절이 있다. 각 지방에서 오래 전승된 검무는 민속탈춤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조선통신사 일행의 노고를 위로하는 의미에서 수행한 대구 기생 옥진 형제의 황창무, 실학자 박제가가 당대 검무의 제1인자라고 평한 밀양 기생인 운심의 검무가 가면무라고 하지 않았던 걸로 보아서, 조선 후기에는 가면 벗은 춤꾼의 독자적인 검무가 정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검무는 조선 시대 기생들이 춘 대표적인 한국 춤이다. 일제강점기에 국제적인 명성이 자자했던 신무용가 최승희가 추었던 검무도 조선 시대의 기생이 추었던 검무에서 영감을 얻었다. 검무라고 하면, 진주 검무가 유명하다. 여러 지방에 전승되는 검무 중에서도 진주 검무의 작품성이 가장 현저하기 때문에 문화재로 유일하게 지정되어 있다. 그것도 국가 단위의 중요문화재이다.

정약용은 젊은 날 장인이 경상우병사로 재직하고 있던 진주에 방문해 촉석루에서 진주 기생이 추던 검무를 감상하면서 시로 남긴 바 있었다. 시의 내용을 보면 독무였다. 이로부터 그다지 오래 되지 않은 시점에, 신윤복은 ‘쌍검대무’(간송미술관 소장)를 그렸다. 이 그림에는 조선시대 검무의 모습이 매우 아름답고 여실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림 내용을 보면, 어느새 검무가 독무에서 쌍무(2인무)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순조 때 지방의 춤들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이 춤들이 표준화되면서 궁중무용으로 격상된다. 임금께 바치는 예술적 재능을 두고 정재(呈才)라고 하는데, 검무 역시 정재(무)의 주요 목록이 되었다. 검무는 지방 교방에서 4검무로 추어졌고, 궁중에서는 각 지방의 검무들이 정재화(표준화)되면서 8검무로 정립된다. 검무의 연행자는 이처럼, 독무, 쌍무, 4인무, 8인무로 확장되어 갔다.

지방의 무기(舞妓)들이 입소문이 나면 궁중으로 뽑혀간다. 진주 교방청에서 뽑혀간 기생들이 적지 않았다. 이 중에 한말에 이르면, 산홍과 최순이가 있었다. 검무에 특히 능한 두 무기는 십 수 년의 나이 차가 있었지만, 비슷한 시기에 고종 앞에서 연행했다. 산홍은 서울에 남아 난세의 애국 기생이 되지만, 최순이는 관기 제도가 폐지되면서 귀향한다. 궁중정재의 영향을 받은 그는 귀향한 후에 어려서 교방에서 배운 진주 원(原)검무를, 진주 신(新)검무로 개량한다. 정약용이 시로 남긴 검무는 진주 원검무요, 시민들이 지금 알고 있는 검무는 진주 신검무다.

훗날 최순이는 진주 권번의 춤 선생으로 장기간 활동한다. 그는 진주 춤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준 가교다. 그가 없었다면, 진주 춤의 전통과 계승도 결코 생각할 수 없다. 한 시대의 명무인 김순녀도 그의 제자다. 두 사제 간의 계보는 바로 진주 춤의 역사다. 두 사람은 자연인을 넘어 예인이니까, 본명보다 예명으로 명명하는 게 좋겠다. 이른바 최완자-김수악 계보라고 해야 온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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