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31)‘붉은 악마의 성벽’을 넘지 못하다
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31)‘붉은 악마의 성벽’을 넘지 못하다
  • 경남일보
  • 승인 2020.07.27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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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대산악부, 탈레이 사가르원정대 악천후로 눈물
북벽~북서릉 루트 변경, 정상 300m 남겨두고 후퇴
 
1996년 탈레이샤가르 북서릉 6500m 구간에서 정철경. 강성규 대원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경상대학교 산악부는 개교 50주년을 기념하고 탈레이 사가르 북벽 신루트를 내기 위해 1996년 탈레이사가르원정대를 구성했다. 원정대는 난이도가 높은 6000m급 등반을 계기로 향후 8,000m급 등반을 준비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원정대는 안재홍 대장을 중심으로 이수호(행정)·최홍권(촬영)·손우진(의료)·류성호(장비)·정철경(식량)·강성규(수송·포장)·문성훈(기록) 8명으로 구성됐다. 강성규와 문성훈은 제주대 산악부 출신으로 이번 원정에 합류했다.

경상대·제주대 합동대 구성

1996년 4월 20일 한국을 출발한 원정대는 12시간 만에 인도 델리공항에 도착했다. 대원들은 항공으로 보낸 화물들을 찾고 인도산악연맹(IMF)을 찾아 등반 신고 등 행정절차를 밟느라 1주일을 보냈다. 뉴델리에서 버스로 16시간을 달려 인도북부 우타르카시에 도착, 부족한 식량과 장비들을 구입했다. 4월 26일 인도 북부 우타라칸드주에 위치한 강고트리로 출발했다. 해발 3000m 산악지대에 있는 강고트리는 힌두교 성지로 유명하며 탈레이 사가르로 가는 마지막 마을이다. 강고트리는 가르왈히말라야에서 케다르나트, 바드리나트, 아무노트리와 함께 힌두교 4대 성지로 인도인들, 특히 힌두교 신자들은 삶을 마감하기 전 꼭 가보고 싶은 곳들이다.

강고트리에서 대원들은 식량과 등산 장비 등을 30㎏으로 재포장해 포터들에게 나눠주고 본격적인 도보 카라반을 시작했다. 고도가 높아 일부 대원들은 고소 적응에 문제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힘차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은 하얀 산을 바라보며 우거진 숲과 계곡을 지나 베이스캠프로 향했다. 5월 1일 해발 4700m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컨디션이 좋은 강성규·손우진·류성호 대원은 곧바로 1캠프 설치를 위해 출발하는 등 순조롭게 등반이 진행됐다.

 
1996년 탈레이샤가르 베이스캠프
폭설로 3캠프 건설에 난항

5월 2일 1캠프(5250m)에 2동의 텐트를 설치했다. 다음날 날씨가 좋지 않아 휴식을 취한 대원들은 5월 4일 다시 캠프 작업에 나서 200m를 더 올려 2캠프를 다시 설치했다. 어린이날인 5일에는 2캠프(5600m)를 설치하는 등 고소에 적응하며 캠프를 높여갔다. 5월 6일 2캠프를 건설하며 지친 강성규·손우진·류성호는 베이스캠프로 내려가고 최홍권·문성훈·정철경 대원이 3캠프를 만들기 위해 캠프를 나섰다. 그러나 3캠프(6300m)로 가는 암벽에 포탈레지(portaledge·허공 침대)를 설치키로 했다. 포탈레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벽으로 접근해야 했지만 눈을 헤치고 나가면서 고정 로프를 설치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3일간 그들은 350m에 고정로프를 설치하지 못했다. 오전에 좋은 날씨가 오후만 되면 눈이 내리면서 대원들의 의지를 꺾기 일쑤였다.

탈레이 사가르 등반이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화강암에 얼음이 얇게 얼어있어 벽을 오르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또 화강암이지만 낙석이 많고 눈이 계속 흘러내리는 스노우 샤워 현상으로 시야 확보가 제대로 되지 않아 등반에 불편을 겪기 때문이다.

악천후 뚫고 정상으로 가는 캠프 구축

6500m 지대는 암벽과 빙벽 혼합지역이고 경사가 평균 70도로 심해 많은 체력을 소모할 뿐만 아니라 6500~6700m 지점은 미끌미끌한 화강암으로 설악산 울산바위를 방불케했다. 경사는 거의 직벽에 가까울 정도로 힘든 구간이다. 마지막 6700m에서 정상까지는 검고 긴 바위와 설릉으로 구성돼 있는 푸석바위 지대로 경사는 70~85도로 심한 편이라 만만치 않은 구간이다. 며칠간 계속되는 악천후를 뚫고 5월 12일 암벽 구간에 고정로프를 설치하는데 성공했다. 대원들은 정상으로 가는 최대 고비를 넘어서자 정상 공격을 위한 회의에 들어갔다. 안재홍 대장은 대원들의 컨디션을 최고 우선으로 생각하고 날씨 등을 고려, 정상 공격조를 결정하기로 했다.

5월 15일 전 대원이 베이스캠프를 출발해 1캠프에 5명이, 2캠프에 4명이 도착했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부터 날씨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날씨는 점점 악화돼 많은 눈이 내리기 시작했으며 안개도 자욱하게 끼여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2캠프로 하산했다. 그날 저녁 안재홍 대장은 정상 공격조로 강성규 대원과 류성호 대원을 선발했다. 5월 17일 새벽 2명의 대원은 1캠프를 나서 오전 7시 2캠프에 도착했다. 그들은 포탈레지를 설치하는데 거의 하루가 걸렸다. 다음날 3캠프 건설이 끝나자 손우진·정철경 대원이 식량과 고정 로프를 갖고 3캠프에 지원했다.

 
1996년 탈레이샤가르 2캠프에서 북서릉으로 정상으로 가기 위해 나선 대원들 정철경강성규
정상 공격조 동상 걸려 교체

5월 19일 최종벽 하단까지 고정로프를 설치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류성호 대원이 손가락 동상으로 정상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철경 대원은 위장병으로 힘들어했다. 결국 손우진 대원이 공격조로 가담했다. 이수호·문성훈 대원이 고정 로프 작업에 나섰다. 이날 150m 이상의 고프를 깔아야만 정상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그러나 한 피치(pitch 평균 40~60m, 구간·난이도에 따라 차이가 남)를 오르는데 2시간 정도 걸렸다. 속도가 너무 늦었다. 때마침 날씨도 원정대 편이 아니었다.

안재홍 대장은 결단을 내렸다. “탈레이 사가르 북벽은 체력이나 기술, 시간을 고려했을 때 더이상 등반은 의미가 없었다. 대원들은 안전하게 하산하라! 다음 기회에 도전하자.”

북벽→북서릉 루트 변경 도전

원정대는 북벽이 아닌 북서릉으로 루트를 변경해 다시 한번 정상에 도전하기로 했다. 대원들이 하산하는 동안 안재홍 대장과 이수호, 최홍권 대원이 북서릉 루트 작업에 나섰다. 북서릉은 북벽보다 눈이 많았지만 200m 구간에 로프 설치 작업을 마쳤다. 5월 22일 정철경 대원 등은 비박을 생각하고 북서릉을 따라 올라갔다. 약 400m 거리를 헤치고 나가는데 많은 시간과 체력을 소비해야 했다. 오후가 되면서 또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눈사태가 흘러내렸다. 대원들은 비박을 시도하지도 못하고 후퇴해야 했다.

5월 23일 새벽 4시. 마지막 기회를 살리기 위해 강성규·문성훈·정철경 대원이 북서릉을 오르기 시작했다. 공격조는 간단하게 비박 장비만 챙겼다. 하늘도 무심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맑은 날씨를 보였고 그들은 6500m에서 설동을 파고 비박에 들어갔다.

체력 떨어져 6630m에서 발길 돌려

5월 24일 등반 장비만 챙긴 3명은 설동을 나섰지만 그들 앞에 펼쳐진 북서릉은 만만치 않았다. 능선에 쌓여 있던 눈들은 녹아내려 파란 청빙구간으로 변해 있었다. 또 정상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구간은 경사가 센 암벽지대로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됐다. 만약 공격에 나선다면 비박을 한 번 더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대원들의 체력은 북벽과 북서릉을 등반하면서 완전히 떨어져 있었다.

결국 원정대는 6630m에서 뒤돌아섰다. 그러나 경상대와 제주대 합동대는 1개월 넘게 한국 산악계가 넘지 못한 탈레이 사가르 북벽 6630m까지 진출하는 성과를 거두며 원정을 마무리했다. 한국 산악계가 1993년부터 4년간 오르려고 했던 ‘붉은 악마의 성벽’을 넘지 못하고 다음으로 기회를 미뤄야만 했다.

정철경 대원은 이렇게 회고했다. “탈레이 사가르는 2000m가 넘는 직벽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뛰어난 체력과 기술,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당시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대부분 원정대가 극복하지 못한 6400m를 넘어 6600m까지 진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던 등반이었다.”

박명환 경남산악연맹부회장·경남과학교육원 홍보팀장

 
1996년 탈레이샤가르 6 600M 지점에 선 정철경
[탈레이 사가르 등반사]

탈레이 사가르(THALAY SAGAR 6904m)는 인도 가르왈히말라야 중앙에 위치한 대표적인 산이다. 탈레이 사가르는 인도의 유명한 힌두교 성지인 강고트리에서 가장 아름답지만 오르기 힘든 산으로 정평이 나 있다. 탈레이 사가르는 암벽과 빙벽, 설벽을 올라야 하는 혼합 등반에 경사가 워낙 심해 ‘악마의 붉은 성벽’으로 불리고 있다. 탈레이 사가르는 쉬블링(SHIVLING 6543m)과 함께 첨예한 거벽 등반을 해야 하는 가르왈 히말라야의 대표적인 6000m급 산이다.

1979년 6월 24일 영국·미국합동대가 탈레이 사가르에서 처음으로 등반을 시도했다. 피터 텍스텐과 존 테크레이는 알파인 스타일로 북벽과 서릉을 통해 7일 만에 등정에 성공했다. 1983년에는 폴란드·노르웨이가 북동릉을 야누스와 스코텍이 루트를 초등했으며 1987년 스페인 오스카 카디히가 북서벽을 초등했다. 1991년 헝가리는 북벽 초등을 시도했는데 오즈베스와 데카니가 6번의 비박을 통해 북벽 초등에 성공하는 기염을 토했다. 1992년 영국의 케이츠 밀러는 남벽을 초등했다. 1979년 초등 후 17년이 지났지만 등반 루트가 4개 밖에 없다는 것은 그만큼 탈레이 사가르의 등반 난이도를 실감케 하고 있다.

한국이 탈레이 사가르를 처음 등반한 것은 1993년 대구합동대였다. 그들은 북벽을 통해 등정을 노렸지만 6400m에서 실패했다. 이후 한국은 1994~1996년 3년 연속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1998년 9월 28일 국내 최고의 거벽 등반가였던 최승철·김형진·신상만 대원이 북벽 신루트를 개척하며 정상 100여m를 앞두고 했지만 추락사하는 등 한국과는 슬픈 인연을 갖고 있다.

 
등반루트
[취지문]

이번 원정을 준비하면서 저희들의 부담감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가고 있습니다. 이미 한번의원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저희들의 발목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저 7,000미터의 설산으로 이끄는 것은 시지프스의 형벌과도 같이 우리들에게 지워진 운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등산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살아가는 가치를 찾아가는 산악인들에게 운명이라는 말보다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은 없는 듯 합니다.

지금도 우리 산악회원들은 올해의 원정등반을 위해 그들의 빛나는 젊음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젊음은 산을 통해서 이루어져 왔고 산을 통해 이루어 나갈 것입니다. 저는 그들의 선택이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이번 원정을 통해 다시 한번 그 가치를 증명해 보일 것입니다.

끝으로 이번 원정에 많은 도움을 주신 총장님을 비롯한 학교 당국과 26년의 세월 동안 줄곧 본 산악회를 오늘의 모습으로 가다듬듬느라 애쓰신 지도 교수님, 그리고 회원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원정 성공의 소식을 드림으로써 오늘이 있기까지의 성원에 보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996년 4월 6일 원정대장 안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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